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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은 정부가 자행한 일종의 정치적 인종청소였다. 국민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보도'연맹이었지만, 이는 낙인으로 작동하여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보도연맹원 학살은 언제 처음 시작되었을까? 

오랜 기간 최초의 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7월 1일 이천에서 발생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07년, 한 사람의 용기에 의해 그보다 앞서 강원도 횡성과 원주에서 처음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이 학살은 국지적이고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군 통수권자에 의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정황이 추가로 확인되기도 했다.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 횡성 고내미 고개

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의 6사단은 후퇴하는 와중에 횡성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반 주민들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8일, 고내미 고개에서 이들을 사살한다.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이다.

또한, 횡성읍 곡교리의 민가에서도 학살이 일어난다. 고내미 고개와 곡교리에서 희생된 인원은 약 100여 명으로 추정된다.

군인뿐 아니라 경찰도 보도연맹원 학살에 가담했다. 청일 지서는 보도연맹원들을 모아 청일 국민학교 인근 골짜기에서 살해한다. 그 외에도 횡성경찰서는 7월 1일 후퇴하면서 주민 20여 명을 경북 영천까지 끌고 간 다음 살해한다.

횡성을 거쳐 원주에 도착한 6사단은 여기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하여 원주 경찰서에 감금한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파 고개로 끌고 가 학살한다. 이때 희생된 인원은 40~50여 명이다.

또한, 원주 형무소의 재소자 180여 명을 충주로 이감한다면서 3~4명씩 포승줄에 묶어 트럭 6대에 나눠 태웠다. 한참을 이동한 후에 충주에 도착했다며 재소자들을 트럭에서 내리게 했는데, 그곳은 충주가 아니라 원주읍 뒷산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모두 살해된다. 그런데 원주 형무소는 1979년에 생겼기 때문에 이 당시 형무소는 원주경찰서 유치장이거나 6사단 군 형무소로 추정된다.
  
  1950년 6월 28일,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이 일어났다
▲ 횡성 고내미고개  1950년 6월 28일,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이 일어났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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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의 후퇴 경로는 학살 경로

6사단은 인민군에 밀려 강원도에서 충북을 거쳐 경북까지 후퇴한다. 그런데, 6사단의 후퇴 경로와 일자는 각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 일어난 일자와 거의 일치한다. 6사단은 후퇴하는 와중에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 곳곳에서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다.

6월 28일 횡성을 시작으로 7월 초에 원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후 7월 5일에는 충북 진천과 충주에서 최대 1300여 명을 학살한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음성에서 40여 명을 학살한다. 이후 7월 9일과 10일에는 청원에서만 1000여 명을 학살한다. 이 사건이 바로 유명한 옥녀봉과 오창창고 사건이다. 이후 경북 북부로 후퇴한 6사단은 영주, 문경, 상주에서 또다시 총 1000여 명 이상을 학살한다.

강원도의 강릉, 묵호, 삼척, 춘천 등까지 모두 합해서 6사단이 학살한 보도연맹원의 수는 4700여 명에 이른다. 6사단뿐 아니라 다른 군부대와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가 저지른 학살까지 합치면 정말 엄청난 숫자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6사단은 북진하여 9월 30일에는 원주와 횡성을 수복한다. 그리고 곧바로 인민군 점령 기간 중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해 또다시 세고개에서 살해한다. 하지만, 다시 전선이 밀리면서 1.4 후퇴 직전, 군은 원주와 횡성을 떠나야 했다. 이때는 퇴각하던 경찰이 원주의 양안치재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원주를 수복한 6사단은 곧장 부역 혐의자들을 색출하여 학살한다(1950년 10월 2일).
▲ 원주 세고개 삼거리  원주를 수복한 6사단은 곧장 부역 혐의자들을 색출하여 학살한다(1950년 10월 2일).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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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퇴각하던 원주 경찰은 이곳에서 다시 민간인들을 살해한다
▲ 원주 양안치재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퇴각하던 원주 경찰은 이곳에서 다시 민간인들을 살해한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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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시작, 대통령의 특명

횡성과 원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비롯해 6사단의 만행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6사단 헌병대 4과장이자 일등상사로 근무했던 김만식씨의 증언 덕분이었다.

2007년 7월 4일, 김만식씨가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1950년 6월 28일에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 최초로 횡성에서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6사단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학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증언한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직접 횡성 사건의 일부 현장을 지휘했으며, 원주에서는 확인사살까지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당시 군인들의 간접 증언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사건에 참여한 이의 구체적인 증언은 처음이었다.

김만식씨의 증언은 여러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과 정황을 알려 주었다. 우선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과 학살을 결정한 계기와 시점에 대한 것이다. 

그동안 보도연맹원 학살을 합리화하려는 측의 주장 중 하나는 학살이 서울 함락 이후에 어쩔 수 없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울은 전쟁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에 함락된다. 그러자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게 협력하는 모습이 나타났고, 이런 현상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지 않도록 어쩔 수 없이 전국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전까지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은 7월 1일 이천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김만식씨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에 첫 학살이 일어났고, 이는 서울 함락 이전 전쟁이 터지자마자 이미 정부가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에 나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은 유사시 보도연맹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학살을 언제 누가 명령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김만식씨는 횡성 사건 발생 하루 전인 6월 27일 헌병대 사령부로부터 '대통령 특명'이라는 무전을 직접 받았다고 한다. 그 특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명령에 불복하는 부하를 처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했던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2000년 제주 인권회의에서 '분대장 이상 계급에는 즉결권이 있었다'는 증언과 일치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을 명령했다는 정황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증언이었다.

그의 증언은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시점을 앞당기면서 이전의 주장과 사실을 재검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학살이 누구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증언이었다.
  
  김만식 씨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하여 기자회견 당시 공개된 것으로 6사단의 이동 경로는 곧 학살 경로였다.
▲ 6사단 헌병대의 보도연맹원 처형지도  김만식 씨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하여 기자회견 당시 공개된 것으로 6사단의 이동 경로는 곧 학살 경로였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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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이후...

김만식씨는 다부동 전투에서 육탄 결사대 24명의 소대장으로 12대의 인민군 전차를 파괴했다. 이 공로로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받았는데, 2007년까지 헌병대에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리고 육군 대위로 제대한 뒤에는 충북 재향군인회 이사 등은 지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학살에 참가한 것이 평생 마음의 고통이었다. 그래서 80세가 넘은 전쟁영웅은 힘겹게 용기를 내게 되었다.

김만식씨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것에 대해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리고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 유족회장과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눴다. 그는 그동안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이렇게 죽기 전에 고백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만식씨처럼 한국전쟁 당시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야 했던 많은 이들도 어쩌면 국가 폭력의 또 다른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기자회견은 개인 차원의 참회이면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지 보여주었다.

기자회견 이후 김만식씨에게 국내외 여러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었다. 이와 함께 과거 동료나 군 관계자들의 분노와 원망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추가로 나서는 다른 증언자는 없었고 언론의 관심도 식어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 김만식씨를 비롯한 많은 관련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면서 고백과 사과, 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우리 사회가 이미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슬퍼진다.

[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박석진&신재욱,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오마이뉴스,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2007.07.04
오마이뉴스, <한 노병의 참회 "죽기 전에 고백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2018.03.13
진실화해위원회, <경기 강원 국민보도연맹사건>
한성훈, <가면권력, 한국전쟁과 학살>,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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