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연출한 김오안 감독, 브리짓 부이요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연출한 김오안 감독, 브리짓 부이요 감독. ⓒ 영화사 진진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프랑스 문화예술공로 훈장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김창열 화백(1929~2021)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프랑스 활동 초기부터 '물방울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해 반평생을 물방울에 천착했다. 제주도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운영 중이고,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기억한다. 그에 대한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지만 정작 그의 삶과, 내면 정신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김창열 화백을 다루고 있다.
 
북한 평안남도 맹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그의 삶은 아들의 눈에 수수께끼의 연속이었다. 줄곧 집 아니면 작업실에 머물며 정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으면서도 정부 행사나 여러 문화계 모임엔 빠지지 않았던 아버지. 그 복잡하고, 역설적인 면도 있는 욕심 많았던 젊은 작가가 늙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면을 숨겼다. 김오한 감독은 지난 26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다큐를 만든 건 그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였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세대를 다시 잇는 마음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김오안 감독은 사진 작가이자, 영화 감독,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예술인이다. 세계 미술계에 족적을 남기던 아버지는 아들에겐 늘 말을 아꼈다. 아버지의 침묵을 일종의 철학적 반응으로 생각하던 김 감독은 순전히 사적인 영감으로 영화화를 결심했고, 그를 오래 지켜보고 함께 작업해 온 동료 작가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이 돕겠다고 자청했다.
 
영화는 단순히 김창열 화백과 지인, 가족 등의 인터뷰로 채워진 게 아닌 김창열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을 강조한 결과물이었다. 작업하고 일상을 보내는 김 화백의 모습과 함께 김오안 감독의 내레이션이 흘렀고, 그 틈을 감각적인 인서트샷으로 채우고 있었다. 단순히 한 인물의 공과를 담는 게 아니라 정서적 흐름을 포착해 관객에게 인물 다큐를 넘어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한 장면.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애초부터 에세이 다큐를 하고 싶었다. (프랑스 사진작가이자 감독) 크리스 마커나 장 뤽 고다르 감독을 좋아하는데 그들처럼 재밌게 영화를 구성하고 싶었다. 사실 아버지는 집 아니면 화실에만 계시고 잘 움직이지 않으신다. 영화가 지루할까봐 어떤 대조 장면이 필요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과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그의 삶과 연결된 사회와 역사적 맥락도 보여주고 싶어서 인서트 장면을 활용했다." (김오안 감독)
 
"이 작품은 한국영화면서 프랑스영화기도 하다. 프랑스 관객들에게 김 화백의 인생과 배경을 설명할 필요도 있었다. 그가 프랑스에서만 살았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인서트 장면으로 아들인 김 감독의 시선을 구현하는 것도 중요했다. 이 공동작업에서 비중이 가장 컸던 건 저와 오안 감독의 시선을 교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안 감독이 어릴 때부터 바라보 온 김창열 화백과, 그의 그림에 대해 정말 많이 이야기했다. 작업하면서 김오안 감독과 그의 아버지 세대를 다시 어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
 

2014년부터 약 1년 간 생각했던 촬영은 무려 5년이나 지속됐다. 프랑스 국립 영화센터(CNC) 등 여러 곳에 지원을 신청했지만 제작비 마련이 쉽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고, 촬영할수록 김 화백의 정신적 부분을 담으려는 욕심도 작용했다고 한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아버지를 촬영한 김오안 감독은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과 많이 대화하면서 아버지의 작업과 아버지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이 여의치 않은 날엔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이 촬영을 맡기도 했다.
 
"처음 준비할 땐 (아버지 고향) 맹산에서도 촬영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모았는데 성사되지 않아 많이 아쉬웠다. 어떻게 보면 시같은 다큐를 하고 싶었고, 이 영화가 교훈적인 영화가 되길 원치 않았다. 관객분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의미를 찾을 수 있게끔 이미지 배열도 중요했다. 물이나 바람 등 연결된 이미지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건 김창열 화백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김오안 감독)
 
김오안 감독이 내레이션 하는 방식은 부이요 감독의 제안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약 100점 가까이 되는 김 화백의 작품들도 부이요 감독이 선정한 게 많았다고 한다. 음악 또한 김오안 감독이 직접 만들어 삽입했다. "카메라 위치, 촬영 방식을 얘기하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화하듯 내레이션을 제안하게 됐다"며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은 "처음엔 주변에서 한국인도 아니고 네 아버지도 아니면서 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는지 물었지만, 한국에 와서 촬영을 시작하니 김 화백에게 나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연출한 김오안 감독, 브리짓 부이요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연출한 김오안 감독, 브리짓 부이요 감독. ⓒ 영화사 진진


 
영적인 시각에 눈 뜨다
 
전쟁으로 친구 및 이웃의 죽음을 목도한 사내, 도망치듯 동네를 빠져나와 그림에 정진하기로 한 후 뉴욕과 프랑스를 전전한 화가, 그리고 아들에겐 아름다운 동화 대신 수행을 위해 눈꺼풀을 잘라낸 달마대사 이야기를 해준 아버지.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삶에 대해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만들며 저 또한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 겪은 고통에 대해 대충만 알고 있었거든. 어떤 이야기도 아버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작은 아버지가 많이 이야기해주셨다. 아버지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땐 동시대 화가들처럼 추상화를 하셨다. 그 다음 뉴욕에 머물 땐 팝아트가 유행이었으니 그런 그림을 그린 것 같다. 파리에 정착하고 나서 본인이 받은 영향을 하나로 통합하신 셈이다. 그 구심점이 물방울이었다. 한국에서 받은 미술 교육 영향이 뉴욕에서 찢어졌고, 파리에서 물방울 이미지를 발견하며 말 그대로 자유를 얻은 셈이다. 쉽게 말하면 물방울에 아버지가 품고 있던 상반된 개념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신 것 같다. 선불교나 도교와 관련한 물의 순수함, 동시에 본인이 겪은 과거의 비극을 눈물로 담아내는 식으로 말이다. 헛됨, 공허함이라는 개념도 그 물방울이 포괄할 수 있었다." (김오안 감독)
 
"사실 전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잘 몰랐다. 영화를 하면서 깊이 깨닫게 됐고, 제가 미술 작품을 보는 데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줬다. 좀 더 영적인 그림이랄까. 그를 처음 만난 건 2009년께 김오안 감독의 사진 전시 때였는데 여느 아버지처럼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등의 말씀을 전혀 안 하시더라. 아마 이 영화를 생전에 보셨다면 역시나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웃음). 다행히 이 영화를 보신 관객분들 반응이 매우 좋아서 놀라우면서도 기쁘다."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

 
김오안 감독은 "아마 아버지가 보셨다면 서운해 하실 부분도 영화에 있을 것"이라며 "그래서 아버지가 이 다큐를 보시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를 담은 영화인 만큼 최대한 노력했고, 그의 유산을 표현하려 했으니 애정 어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고 속마음을 밝혔다.

강렬하진 않지만, 울림이 있는 다큐멘터리로 두 감독은 관객과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김오안 김창열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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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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