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1 05:09최종 업데이트 22.10.11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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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남과의 관계가 아닌 내 맘속 그러니까 나와의 관계, 그중에서도 희망이 사라져가던 한때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희망은 꼭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성공하겠다는 욕망도, 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욕심도 희망이지만, 그냥 숨 쉬고 살 수 있다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것 역시 희망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사소한 희망이 사라지는 때가 있는데 그게 정말 무섭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 때가 많고, 그 영향이 생각보다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너무도 치열한 경쟁 사회에 내몰리고 있는 지금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되는데, 나는 시력을 잃고 난 후 조금은 심하게 이것을 겪었다.

등산화를 신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면서도, 내 멋대로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서도 나는 한동안 뭔가 허전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우울의 늪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도 무엇인가 부족했다. 여전히 내 맘속에선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고, 그럴수록 나란 존재 자체 또한 그만큼씩 지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화창한 휴일이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불안해 나는 아내에게 산책을 청했다. 그런데 아내는 할 일이 있다며 자꾸 미루기만 했고 그사이 점심때가 됐다.

"라면 먹을까?"
"뭔 라면... 그냥 밥 먹지. 잠깐만 기다려요."


안방에서 뭔가에 열중하던 아내가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산책을 못 간 것에 조금 토라졌던 난 그냥 직접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그날, 라면 스프 봉지처럼 내게 쌓인 감정도 모두 뜯겨졌다. ⓒ 김승재

 
라면을 찾아 봉지를 뜯고 수프를 꺼내는 사이 물이 끓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로 다가간 나는 건더기 수프와 분말 수프 두 개를 동시에 뜯었다. 평소라면 몇 번이고 손을 내밀어 냄비 위치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수프를 넣었을 텐데 기분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날 나는 대충 냄비가 있을 만한 곳에 두 개의 수프를 동시에 쏟아부었다.

"아이쿠! 이게 뭐야."

냄비 아래 가스레인지 불길이 갑자기 크게 일더니 수프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안방 문을 열고 나서던 아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이게 뭔 난리야, 저리 비켜요."

서둘러 달려온 아내가 나를 밀어내고 상태를 살폈다. 수프 절반 가까이가 냄비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스 불로 떨어졌다.

"기다리라니까 뭔 라면을 끓인다고... 저기 가서 그냥 가만있어요."

당황스럽기도, 미안하기도 해서 안절부절못하던 난 아내의 이 말에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 당신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병신은 그냥 가만있으란 거야, 뭐야?"

놀란 아내의 숨이 멎는 게 느껴졌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여기가 난리니까 가서 기다리란 거지."

난 참을 수 없이 분노가 터져 나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 난 아내가 날 무시한다고만 느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난 계속 왜 나를 무시하냐고 우겼고, 아내는 도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하냐고 따져 물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한 쌍의 바퀴 같았다.

결국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고, 난 문을 세게 닫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들릴 듯 말 듯 흐느끼는 아내의 울음소리에 마음 한구석이 찔리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울음소리가 여전히 날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데 문득 온갖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자꾸 뭘 하려고 하지마. 오히려 방해만 된다니까.'

'미안하지만 좀 비켜 줘. 도움이 안 된다고.'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거야.'

'그건 네가 보일 때나 가능했지. 그냥 있어.'

가족의 말도 있었고, 친구의 말도 있었고 친하지 않은 어떤 사람의 말도 있었다. 모두 날 무시하는 말 같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아내에게라도 따지려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목멘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뿐 아니라 아무도 당신을 무시하지 않아요. 당신이 당신을 무시하는 거지."

큰 소리로 반박하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점점 멍해지기만 했다. 아내는 잔뜩 화가 나서 내게 몇 마디 더 퍼붓고 나갔지만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내가… 내가 날 무시하고 있다고?'

조금 전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목소리들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어떤 것은 짜증이 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웃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진지했고 또 어떤 것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목소리에서 날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머릿속이 아니라 맘속에서 뭔가를 듣고 싶었다.

너무 어두워서 안 보이는 거겠지, 그냥 좀 시야가 좁아진 것뿐일 거야, 좀 뿌옇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이잖아. 야금야금 그렇게 내 시력은 사라져 갔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내가 볼 수 없다는 걸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을 때 난 모든 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방황하는 사이, 나란 존재, 내 삶, 그 모든 것에 대한 기대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갔다. 공기가 있으니까 숨은 쉬지만, 먹을 걸 가져다주니까 먹기는 하지만 나란 존재가 스스로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겁이 났다. 분명 잘 놀고 잘 떠들고 잘 웃고 어울렸지만 혼자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왠지 나는 그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어떤 이질적인 존재가 돼 버린 것 같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조금 불편한 자리에 갔을 때만 그런 느낌이 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린 후에도, 친지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낸 뒤에도, 심지어 가족과 함께한 후에도 자꾸 내가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점점 의욕이 사라졌고 나 자신이 미워졌다.

'정말 그랬나? 내가 날 무시하고 있었단 말이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기 싫어하면서도 가야 하는 군대를 난 가지 못했다. 내 눈은 이미 그 전부터 장애가 되고 있었다. 눈 때문에 운전도 할 수 없었고, 취직도 제한이 많았다. 지금도 도움을 주시는 변리사님 덕분에 작은 회사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시력을 잃으면서 접어야 할 상황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형편없이 줄어든 내 수입이 창피했다. 가족들을 태우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샘이 났고, 활기찬 취미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듣기 싫었다. 번듯한 명함 하나 없는 내가 한심했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초라해져만 갔다.

난 날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독히도 미워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진짜 내가 날 무시 아니 미워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문득 사람은 공기가 없어도 3분, 물이 없어도 3일, 음식이 없어도 3주를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없다면 단 1초도 버틸 수 없다며 희망의 소중함을 말하시던 신부님 말씀이 떠올랐다.

"희망, 희망이라…'

다시 눈을 감아 보았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희망도 사라져요. 그리고 희망이 사라지면 결국 자기란 존재도 사라집니다.'

딱 내 모습이었다. 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나란 존재가 지워지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분명 말씀하셨던 거 같은데 그냥 머릿속에서 맴돌 뿐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벌렁 드러눕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답은 간단했다. 내가 날 사랑할 수 있다면, 내 맘속엔 다시 희망이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날 사랑하려면 내가 날 미워하게 된 그것, 날 무시하게 된 그것을 없애버리면 됐다.

'그래, 내가 날 인정할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러려면…'

남이 아닌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그것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해야 했다. 난 저녁도 거른 채 고민에 고민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내 앞으로 다가갔다.

"아깐 정말 정말 미안했어요. 그리고 말이야… 나 일을 해보려 하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아내가 물었다.

"일? 무슨 일?"

난 어린애처럼 크게 답했다.

"나 아이들 역사 가르치는 걸 본격적으로 해 볼까 해서..."

한동안 답이 없던 아내가 웃었고 나도 바보처럼 따라 웃었던 거 같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다. 막걸리 한 잔이 필요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희망이 될 수 있다. ⓒ 김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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