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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반 아이들이 가장 많이 간 여행지는 어디일까? 나는 '북유럽'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반은 3월부터 매일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으니까.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곳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가 있는 북유럽이 아니다. 'Book you love', 그곳은 '네가 사랑하는 책'이다.

"얘들아. 우리 같이 북유럽 가지 않을래?"

내 제안에 아이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진짜요?"
"정말요?"
"언제요?"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칠판에 '북(book) 유(you) 럽(love)'이라고 썼고, 아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속았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싫지 않은 듯했다. '북유럽'을 다시 소리 내 읽어보더니 '오~!' 하고 감탄을 내뱉었으니.

교실에서 떠나는 북유럽 여행
 
매일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매일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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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Book you love)'이라는 이름은 몇 년 전 신문을 보다 알게 되었다. 가평의 한 독립서점을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서점의 이름이 '북유럽'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 가고 싶은 지역과 책을 연결 지어 이름을 붙인 것이 기발하고 재밌었다. 발음할 때마다 괜히 기분 좋아지고, 책 읽는 우리를 꿈꾸는 여행자로 만들어주는 이름, 북유럽. 나는 교실에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첩에 메모해두었다.

우리반은 매일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소개한다. 우리는 이 활동을 '북유럽'이라고 부른다. 소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기 순서가 되면 작은 포스터를 만들어와 교실 앞 게시판에 붙여놓는 것. 포스터는 각자 개성에 따라 자유롭게 만들되, 다음 사항을 담도록 한다.

책 표지 사진이나 그림,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책에서 좋았던 문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책과 관련된 퀴즈를 두세 개 정도 내게 했다. 북유럽 포스터를 교실에 붙여놓으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보는 게 이 퀴즈다. 본인이 참여할만한 게 있으면 더 적극적으로 보는 법이다.

그 옛날 방을 붙여놓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아침이면 북유럽 포스터 앞에 모여든다.

'오늘은 누가 어떤 책을 소개했을까?'

아이들이 무심하지 않고 꼬박꼬박 들여다보는 건 매일 새롭기 때문이다. 북유럽은 콘텐츠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날마다 하나씩 업데이트되니까. 'New'가 붙은 게시물이 있으면 얼른 클릭해보고 싶은 것.

"이거 재밌어 보인다!"
"나 이 책 봤는데 진짜 웃긴 거 나와."
"야. 나 볼 거니까 스포하지마."
"이거 다음 편도 나왔을 걸?"
"이 책 도서관에 있을까?"


아이들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게임, 유튜브, 아이돌이 아닌 '책'을 두고. 나는 평소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 번은 꼭 학교 도서관에 다녀오라는 미션을 준다. 책을 대출하거나, 반납하거나, 그게 안 되면 그냥 도서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라고 한다.
 
아이들은 아침이면 북유럽 포스터 앞에 모여듭니다.
 아이들은 아침이면 북유럽 포스터 앞에 모여듭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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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도서관에 다녀온 수현이 손에 <신기한 맛 도깨비 식당> 책이 들려 있었다. 줄곧 과학상식 학습만화나 지식 정보책에만 빠져있던 아이라 웬일인지 궁금해 물었다.

"이거 세연이 북유럽 보고 빌린 거예요."

아이가 그렇게 안 보던 이야기책을 마침내 빌려보게 만든 건 선생님도, 논술학원도 아닌 북유럽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이나 아침 독서 시간에 읽고 있는 책을 가만 살펴보니 북유럽에 소개되었던 책이 꽤 보인다. 소위 말해 아이들은 북유럽에 쉽게 영업 당했다.

엄마 추천보다 나은 친구 추천

예전에 나는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길 바라는 마음에 '학년 필독 도서', '기관·단체 추천 도서', '교과서 연계 도서' 목록을 쫙 뽑아 교실에 게시해놓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옆에 붙여놓은 월별 식단표는 수시로 보면서 도서 목록은 좀처럼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길은 받지도 못한 채 바람에 펄럭이기만 하는 책 리스트를 보며 나는 한숨을 지었다.

'북유럽' 활동을 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얼마든지 아이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기들만의 독서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하루에 한 권씩, 서로가 사랑하는 책을 함께 공유하기. 그것은 어떤 독서교육보다 힘이 셌다.

아이들은 왜 북유럽 책을 잘 봤던 걸까? 또래와는 재미와 공감을 느끼는 부분이 비슷해 그 누구의 추천보다 실패할 확률이 낮다. 엄마가 골라준 옷보다 친구가 골라준 옷이 더 마음에 드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또한 친구가 소개한 책을 읽게 되면 단순히 책만 읽는 게 아니라 그 친구에 대해 알아가는 느낌이 들어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의 관심 대상 1위는 단연 '친구'다. 아이들은 늘 친구가 궁금하고, 가까워지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 그다지 관심 없는 책이지만 친구가 소개해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혹시 아이들이 추천하는 책이라고 하면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는 책, 가볍고 자극적인 책이지 않을까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북유럽(네가 사랑하는 책)'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아서인지 아이들은 무척 신중하게 책을 골라왔다. 나도 북유럽을 보고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여러 권을 담을 정도로 좋은 책이 많았다. 아이들의 안목과 취향은 충분히 믿을 만했다.
 
아이들은 틈틈이 파일을 책처럼 들춰보며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합니다.
 아이들은 틈틈이 파일을 책처럼 들춰보며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합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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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아이들이 만들어 온 포스터는 클리어 파일에 차곡차곡 끼워 놓았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이 담긴 아카이브다. 아이들은 틈틈이 파일을 책처럼 들춰보며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한다.

과연 아이들이 잘 보는 책은 뭘까? 궁금한 사람들에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은 '친구가 추천하는 책'을 제일 잘 본다. 새싹이 돋아날 때부터 나뭇잎이 물들기 시작하는 지금까지 매일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별똥별(나는 우리반 아이들을 '별똥별'이라 부른다)이 있다. 열한 살 별똥별 추천 도서는 다음과 같다.

1. <위풍당당 여우 꼬리>, 손원평(글), 만물상(그림)/창비/164쪽
2. <신기한 맛 도깨비 식당>, 김용세 김병섭(글), 센개(그림)/ 꿈터/148쪽
3. <스무고개 탐정과 마술사>, 허교범(글), 고상미(그림)/비룡소/184쪽
4. <비밀의 보석 가게 마석관>, 히로시마 레이코(글), 사타케 미호(그림), 김정화(옮긴이)/ 길벗스쿨/168쪽
5. <오늘은 5월 18일>, 서진선(지은이)/보림/32쪽
6. <딜쿠샤의 추억>, 김세미.이미진(글), 전현선(그림)/찰리북/56쪽
7. <명혜>, 김소연(글), 장호(그림)/창비/220쪽
8. <라면을 먹으면 숲이 사라져>, 최원영(글), 이시누(그림)/책읽는곰/216쪽
9. <시간 가게>, 이나영(글) 윤정주(그림)/문학동네/204쪽
10. <우주호텔>, 유순희(글) 오승민(그림)/해와나무/60쪽

태그:#북유럽, #책,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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