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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자주 찾는 다낭 오행산에 꽂힌 불교기.
▲ 베트남 한국인이 자주 찾는 다낭 오행산에 꽂힌 불교기.
ⓒ 연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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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역에 나부끼는 깃발이 있습니다. 청, 황, 적, 백, 주황의 다섯 색깔을 가로와 세로로 잇댄 깃발로, 터 좋은 곳이면 어디나 주르륵 꽂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적잖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을 갖습니다. '도대체 이 깃발은 뭐냐'고 서로에게 묻다가 지쳐 더 예쁜 무엇으로 눈길을 돌리는 모습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이 깃발은 불교기입니다. 불교가 기독교의 방식으로 기독교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올코트경(Colonel Henry S. Olcott)이 창안한 깃발입니다. 올코트경이 활약한 스리랑카 불교계로부터 출발한 이 깃발은 오늘날 만국 공통의 상징으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절이 그토록 많은 한국에선 이 깃발이 유명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올해 초 세계적인 인물 한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불가의 제자이니 그들 표현으로는 적에 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불가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로 꼽혀온 틱낫한 스님 얘기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2002년 출간된 <화>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한국에서도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중 그의 고국이 베트남이며 반전운동을 벌이다 정부와 갈등을 빚고 노년에야 귀국했단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틱낫한 스님.
▲ 틱낫한 베트남으로 돌아간 틱낫한 스님.
ⓒ plum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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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외면한 불교지도자 틱낫한

그는 일생 반전과 평화를 설파했습니다. 단순히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이념에 휩쓸리지 않는 제3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치열한 대립의 시대에 제3의 길이라니. 이 일로 그는 공산정권과 자유주의 둘 모두로부터 미움을 샀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1966년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반역자로 공표됩니다. 반대로 1975년 공산군이 미군을 몰아낸 뒤엔 입국까지 거부됩니다. 양쪽 모두로부터 거부당한 것입니다. 그가 입국자격을 얻은 건 2005년이 되어서입니다. 그는 2014년 뇌출혈로 쓰러지고도 한참이 더 지난 2018년에야 고향으로 돌아가길 선택합니다. 그리고 4년 뒤인 올해 입적했습니다.

베트남 불교는 굴하지 않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인 베트남에서 식민제국과 가장 격렬히 맞서 싸운 조직이 불교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뒤 집권한 베트남 인사들은 불교에 호의적이었습니다. 불교는 베트남 남부의 토착문화와도 긴밀히 섞여 까오다이와 호아하오 같은 자생종교로 진화했습니다. 지역민의 지지도 커서 무시할 수 없는 세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공화국 초대 총통이자 열성 가톨릭신자인 응오딘지엠의 차별은 노골적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주교였던 둘째 형 응오딘툭 등 친인척은 물론, 공산세력의 종교탄압으로부터 도망쳐온 90여만의 탈북 가톨릭교도를 받아들여 요직에 앉혔습니다. 그들이 곧 정권유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틱꽝득 스님의 분신공양 장면. 맬컴 브라운(Malcolm Browne)이 찍은 이 사진은 서구사회에 베트남 종교탄압의 심각성을 알렸고 퓰리쳐상을 수상한다.
▲ 틱꽝득 틱꽝득 스님의 분신공양 장면. 맬컴 브라운(Malcolm Browne)이 찍은 이 사진은 서구사회에 베트남 종교탄압의 심각성을 알렸고 퓰리쳐상을 수상한다.
ⓒ 맬컴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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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불교탄압과 불교의 저항

행정부와 국회 등 공직엔 가톨릭교도의 세가 강했습니다.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는 가톨릭교도가 정보국을 위시한 요직을 두루 차지했습니다. 급기야 불교기를 내걸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까지 시행되니 불교도가 폭발하기에 이릅니다. 항거시위가 일어났고 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홉 명이 숨졌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1963년 5월 29일에 있었습니다. 일흔셋 고령의 틱꽝득 스님이 제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당긴 것입니다. 일주일 만에 아홉 불제자가 뒤를 따랐습니다. 불교의 조직적이고 격렬한 저항이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8월엔 사이공의 싸 러이 사원에 군경이 출동해 불교도와 충돌했습니다.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고 백악관 주도로 정권교체 논의까지 나올 정도가 됐습니다.

그러나 감을 잃은 응오딘지엠은 불교도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기 바빴습니다. 그해 11월 쿠데타가 일어나고 응오딘지엠 정권은 붕괴합니다. 베트남에 자유와 민주의 깃발이 나부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진 겁니다.
 
베트남 명소엔 오색 깃발을 흔히 마주할 수 있다.
▲ 베트남 베트남 명소엔 오색 깃발을 흔히 마주할 수 있다.
ⓒ 연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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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역에 불교기가 펄럭이기까지

공산군의 발호로 혼란이 가속화하자 미군이 개입합니다. 8년에 걸친 전쟁은 공산군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집권한 공산주의자들은 베트남의 종교활동을 일체 중단시킵니다. 식민정부에 항거하고 응오딘지엠 정권에도 타격을 입힌 베트남 불교가 또 한 번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 남베트남을 탈출한 보트피플 가운데 불교도가 제법 많았던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베트남 전역엔 여러 사원이 퍼져 있습니다. 불교는 베트남 최대 종교로서의 권위를 굳건히 지킵니다. 도이머이 이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며 베트남 불교 명소는 유명 관광지로 변신했습니다. 다낭의 영흥사나 판시판산 정상의 빅반티엔투 사원이 그런 곳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풍쑤비엔 사원도 언젠가는 제소리를 알아주는 이와 만날지 모르겠습니다.

베트남 어디서나 펄럭이는 오색의 깃발 뒤엔 선연한 핏자국이 묻어 있습니다. 그 선명한 깃발이 널리 사랑받게 되기까지 불교도가 겪어낸 탄압의 역사가 길고 질었습니다. 일제의 강점 뒤 그저 국기만이 아니게 된 태극기처럼, 오랜 침체 뒤에야 제 소명과 만난 유니온잭처럼, 무엇이 진정으로 흥하기까지는 억눌림의 세월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베트남, #불교기, #틱낫한, #틱꽝득,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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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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