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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발병하면서 엄마는 죽고 싶어 했다. 지난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오늘 잠들면 내일 눈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입에 달고 사셨다. 하지만 (내게) 다행히 엄마는 자연사로 생을 마치셨다. 엄마의 죽고 싶다는 말이 징글징글했지만, 그 심정이 터무니없는 다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저히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살고 싶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엄마가 생전에 진지하게 조력사를 애원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에 대하여
 
책 <죽음의 격> 표지. 케이티 엥겔하트 씀.
 책 <죽음의 격> 표지. 케이티 엥겔하트 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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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죽음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락사, 존엄사, 조력사(조력 자살) 등으로(아래 존엄사로 통칭) 불리는 선택한 죽음 말이다. 케이티 엥겔하트가 쓴 책 <죽음의 격>은 이런 선택적 죽음을 택한 사람들과 조력사에 종사하거나 조력 자살을 추앙하는 의사들에 관한 기록이다. 아직 존엄사에 대한 본격적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이 책은 짚어봐야 할 논점을 제공한다.

책에는 말기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 치매로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삶을 마감하고 싶은 환자, 정신질환의 무기력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환자 등이 등장한다. 그들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 그들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지만, 모든 존엄사가 이처럼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존엄사의 쟁점일 테고.

<오마이뉴스> 신아연 기자의 안락사 동행기 중, 당사자 고 허 선생의 "가족 기반이 끈끈하고 유대가 튼실했다면 안락사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에 나는 멈칫했다(관련 시리즈 보기).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할 신뢰할 누군가가 없어 존엄사를 택했다는 쓸쓸하다 못해 침통한 고 허 선생의 말은, 책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봄날의 책)의 한 통찰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것은 괴롭고,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두렵다. 필요한 돌봄과 가능한 돌봄 사이의 간극이 클 때, 우리는 생각을 중단하기 쉽다." 그의 선택적 죽음이 결국 죽음의 과정을 보살필 돌봄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의 죽음을 존엄사라 불러도 괜찮은 것일까.

책 <죽음의 격>에 등장하는 죽음 조력자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며, 다만 특정한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즉 죽는 게 나을 만큼 아프지 않다면, 괄약근 조절이 원활하다면(대소변을 자력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치매로 잃어버린 예전 자아 대신 등장한 새로운 자아를 사람들이 끔찍해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존으로 가족의 경제를 파탄시키지 않는다면 등 특정한 부정적 조건이 제거된다면, 많이 아프다고 죽음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특정한 방식'을 짚어보다가 난 좀 무서워졌다. 이 '특정한 방식'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인의 경우라면 일상의 상태가 아닌가. 말기 환자가 겪는 불연속적인 삶이 아니라 연속되는 '특정한 방식'에 익숙해진 장애인들이라면, 이는 개선할 필요는 있지만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특정한 방식'이 들이닥쳤다고 모두 죽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이 '특정한 방식' 때문에 죽고 싶고 그 죽음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택'으로 여겨진다면, 장애인은 일상에서 죽음이 부추겨지는 디스토피아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존엄사법에 위협을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음이 "현실적 선택지로 인식"되거나 어떤 고통이 죽어야만 끝난다고 믿게 되는 사회에서 장애인이나 건강 약자가 처할 현실은 이럴 수 있다. "장애인은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에 섰을 때, 죽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게 최선이라는 식의 태도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어느 날 아픈 내게 "왜 당신은 아직 여기 있는가? 왜 살아서 계속 우리한테 부담을 주는가?"라는 압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책 중 존엄사를 원하는 한 환자는 만성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간병비로 인한 가정 경제의 파탄을 더 걱정했다. 그는 "내가 죽어야 내 딸이 살아요"라고 했다.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었을까, 자신의 죽음으로 구제할 수 있는 딸의 최소한의 삶이었을까.

정신질환자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상당히 논쟁적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이들이 겪는 정신의 고통은 신체 질병처럼 관찰되거나 측정되지는 않을 뿐 극심한 것이기에, 존엄사는 당연히 인정받아야 할 권리다.

아무리 호소해도 호전되거나 가시화되지 않는 정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들은 정신이 나약해서거나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비정상자들이라 죽음을 원한다고 여겨진다. 의료의 무능이나 방치로 고통의 점철일 뿐인 무의미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이들은 존엄사가 용인되지 않는 것에 분노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존엄사, 누군가에겐 '미끄러진 경사길'
 
흰 국화.
 흰 국화.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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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존엄사를 인정하는 곳에서 죽음은 엄격히 통제되는 듯 보인다. 아직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을 겪는 생애 말기 환자에게만 존엄사를 열어두고 있지만, 점차 죽을 권리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는 법 개정의 진전은 존엄사에 반대하는 '미끄러진 경사길'의 논제가 기우가 아닐 수 있음을 경고한다. 존엄사가 생애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려는 것에서 점차 정신질환자의 조력사까지 허용된다면 미성년자까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가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는 것에서 "시간과 자원을 비용이 덜 드는 방향으로" 전환된다면, 존엄사가 각 나라마다 골치를 썩는 의료비 삭감의 대안으로 떠오를 것이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이다. 노인, 여성, 장애인, 가난한 사람, 정신질환자, 사회적 소수자 등처럼 취약한 계층에게 더욱 혹독할 수 있는, 죽음이 통제되지 않는 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급작스런 죽음이 폭증했다. 그중 노인의 죽음이 가장 많았다. 이때 전염병이 각 나라의 노인 의료비 부담을 줄여줬다는 풍문에 섬찟했는데, 법으로 죽음을 용인하는 풍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오싹해졌다.

내 버킷 리스트엔 존엄사가 있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맞은 스콧 니어링의 죽음에 감화 받은 바 컸다. 하지만 내게 그의 죽음의 방식이 마땅할까에는 고민이 남았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존엄사를 원하는 이유를 성찰하게 됐는데, 뭔가 잘못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죽음은 고통, 더러움, 역겨움, 추함, 가족에 대한 피해 등 온통 부정적인 정서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나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혐오했던 것이다. 쓸모 없어진, 심신이 망가져 똥오줌을 못 가리는, 추하디 추한 늙은 몸은 죽어 마땅하다는 저주에 깊이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떠나고 싶다"는 존엄사가 없다거나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의료가 죽음의 판단을 독점함으로써 자연사라는 오래된 죽음의 형태를 삭제시켰다는 비판도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죽음이 온전한 선택이 아니라 샛길로 침입해 들어온 사회적 압력이라는 살인자의 가면을 쓰고 내게 당도한다면, 이 죽음을 피할 방도가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평화로운 죽음은 모두의 권리"라는 '죽음 의사'의 주장은 어떤 경우에만 진리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죽음의 격 - 필연의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한 방법들에 관하여

케이티 엥겔하트 (지은이), 소슬기 (옮긴이), 은행나무(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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