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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오랜만에 후드티를 만들었다. 후드가 달려 있어도 힘없이 누워 있으면 그건 후드티가 아니다, 라는 개똥철학이 있다. 그래서 입었을 때 후드가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핏을 원했는데 그건 내 마음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적당히 톡톡하니 마음에 드는 원단을 구해야만 구현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바느질을 병행하다보니 원단은 인터넷 쇼핑으로 샀다. 처음엔 아이들 입힐 옷도 그렇고 내 옷 만들 천도 그렇고 시선을 잡아끄는 무늬가 있거나 색감이 눈에 확 들어오는 천들에 주로 손이 갔다.

천을 눈으로 볼 때는 눈에 띄는 컬러가 먼저 보인다. 하지만 옷차림으로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원단은 결국 천의 종류를 불문하고 까만색, 흰색, 그리고 스판이 조금 들어간 청지이다.

안 봐도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후드가 살아있어야 후드티
 후드가 살아있어야 후드티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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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원단 쇼핑이 15년차쯤 되면 화면으로만 봐도 대충 각이 나온다. 매번 사던 곳에서 사다보니 원단 쇼핑몰의 주인장이 원단을 들여오는 선택 기준도 익숙해졌다. 천의 두께를 표현하는 단어들과 실제 받은 천의 두께 간의 상관관계를 경험으로 익혀 두다보니 상세설명을 읽으면 어느 정도 두께일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내 돈 내고 산 물건 중에 가장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건 역시 원단 택배다. 문 앞에 배송된 꾸러미를 집으로 들여와 열어볼 때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이미 다 보고 고른 천들인데 실물로 보면 어떨지, 머리 속에서 상상한 천과 실제로 배달된 천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언박싱의 순간에는 항상 행복한 갈림길 위에 선다.

택배 비닐을 조심스레 뜯은 후 원단 하나하나 포장 비닐을 벗기고 천들을 쓰다듬는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사용해서 원단의 두께를 느껴본다. 잘 접혀온 천들을 펴서 거울 앞에서 둘러보고 허리춤에 대어 보기도 한다. 결론은 금방 나온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거나 딱 생각한 그 느낌이어서 만족하거나 아니면 '아 실제로 보고 사는 거였으면 안 샀을 원단이다', 하며 실망하거나.

반대로 말하면 인터넷 원단쇼핑으로 갈고 닦은 15년차의 눈썰미로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거기에 더해 눈으로 볼 때는 별 감흥을 주지 않던 천들이 옷으로 변신했을 때, 천으로 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매력을 발견할 때가 있다.

평범해 보이던 원단인데 바지를 만들어 놓으니 입었을 때 편하고 무릎도 안 나오고 날씬해 보이는 마법을 부리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절감하게 되는 한편 괜시리 희망이 샘솟는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아니 평범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나에게도 사람들을 깜짝 놀래킬 반전 매력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말이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지만 알고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회사에서 같이 일 할 사람을 가려낼 때도 인터넷으로 천을 고를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력서를 통해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모니터 화면 너머로 천을 보는 것과 닮았다. 많이 접해 보면 경험치가 쌓이지만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분명히 있다.

이력서를 들고 정장을 입고 면접을 보러왔을 때는 알아볼 수 없었던 숨겨진 자질들은 함께 일을 해봐야 비로소 보인다. 모니터 너머로 좋아보여서 선택했는데 배송되고 난 후에, 혹은 옷으로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진가를 알게 되는 원단처럼 말이다.

원단이든, 사람이든 속단은 금물
 
친구와 입을 후드티
 친구와 입을 후드티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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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출신이라 예쁜 얼굴을 무기로 연기를 시작했던 배우가 20년이 지나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하는 걸 보았을 때, 잘생긴 하이틴 스타가 혜성 같이 나타나더니 스캔들 한번 없이 중년의 나이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남배우의 자리를 지켜오는 것을 볼 때도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내 삶의 여정에서 한 명씩 늘어갈 때마다 나는 삶에 대해 다시 겸손해진다. '또 잠깐 나오다가 사라지겠네', 성급히 결론 내리고 외면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 생각을 하곤 한다. 학생이 이렇게 공부를 안 해도 되나 싶게 열심히 놀러 다니는 아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그래도 저 아이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속단하지 말라고, 지레 걱정하지도 말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이곤 한다. 아직 옷이 되지 않은 천을 두고 별것 없네, 속단하면 안 되는 거라고 말이다.

이 티를 만들 때도 그랬다. 눈으로 보기엔 내가 찾던 하얀색 원단으로 보였던 이 천이 내가 원하는 후드 모양을 만들어주기에 적당한지 모니터 너머로 알아볼 능력이 없어서 처음엔 한 벌 분량만 주문했다.

후드티를 만들어서 핏을 볼 수 있는 최소 수량만 주문해서 만들어본 후 확신이 생기자 계획한 수량만큼 만들 양을 다시 주문한 것이다. 10여년의 인터넷 원단 쇼핑 끝에 겸손해진 내가 실패를 줄이기 위해 생각해낸 고육지책이다.

나는 이 후드티를 친구와 맞춰 입고 콘서트에 가서 잘 즐기고 왔다. 화면으로 중계되는 걸 봐도 좋겠지만 직접 겪어봐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따로 있다는 진리는 천을 고를 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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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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