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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 명소 호안끼엠 호수 남쪽엔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있습니다. 베트남 여성박물관(Vietnamese Women's Museum)입니다.

'박물관은 가는 사람만 간다'는 선입견은 곤란합니다. 해외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 기준 하노이의 즐길거리 266곳 중에서 무려 4위를 차지한 인기 장소입니다. 2022년 10월까지 5200개가 넘는 평이 달렸고, 대부분은 만족을 표했습니다.

세금을 들여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 같은 곳이 해외 여행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해온 걸 고려하면(고양시 즐길거리 하위권이고 평도 5개뿐입니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것이 있다면 배워야겠죠. 그래서 가봤습니다.

베트남 여성박물관은 말 그대로 베트남 여성을 다룹니다. 베트남 내 여성들의 삶과 역사,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 유산, 사회적 역할까지를 소개합니다. 박물관은 크게 세 개의 테마로 박문객들에게 베트남 여성을 내보입니다. '여성과 가족', '역사속의 여성', '여성의 의복'이죠.
 
로비에 전시된 동상
▲ 베트남 여성박물관 로비에 전시된 동상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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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아시아에서 가장 성평등한 나라?

첫 코너인 '여성과 가족'은 베트남 여성의 현실을 알게 하는 작은 갤러리입니다. 베트남 내 여러 민족의 결혼부터 출산 등의 모습을 특색 있게 소개합니다. 신부들이 입는 드레스며 행상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끄는 자전거, 아이를 업고 일하는 여성들의 사진이 내걸려 있습니다.

베트남을 성정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독특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지난 수십 년 간 서구 학자들 가운데선 베트남이야말로 아시아에서 가장 성평등한 국가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고 모계사회가 아니냐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가정에서 여성들의 발언권이 강한 탓이었습니다.

각종 국제기구에서 발표하는 젠더격차 보고서에서 한국이 베트남보다 여성 인권지수가 낮게 나오는 것도 그런 시각에 기인합니다. 올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간한 'Global Gender Gap Report 2022(2022 성격차 보고서)'에서 베트남은 83위를 차지해 아시아에선 최고수준인 반면, 한국은 99위로 아시아 평균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전장에 나간 남자들의 빈자리를 적극적으로 채운 여성들을 독려하는 포스터가 여럿 걸려 있다.
▲ 베트남 여성박물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전장에 나간 남자들의 빈자리를 적극적으로 채운 여성들을 독려하는 포스터가 여럿 걸려 있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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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성을 이해하면 베트남이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베트남 사회를 절반만 본 데서 기인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베트남인과 대화를 나눠보면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남성을 확고한 가장으로 보는 인식이 깊이 자리 잡혀 있지요.

한국보다도 유교문화가 강하게 남은 지역이고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최저임금이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 가운데 여성의 임금이 남성에게 크게 못 미치기도 합니다. 임신과 출산이 활발한 나라인 만큼 경력단절 문제도 한국과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베트남 여성들은 사회진출을 멈추지 않습니다. 적잖은 남성들이 실업상태에 비정기적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걸 떠올려보면 여성들의 성실함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많은 아이를 건사하면서도 생업전선에 뛰어듭니다.

가임여성 한 명당 기대되는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률은 무려 2명이 넘습니다. 곧 0.7명대로 떨어져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아동 희소국가가 될 한국과 대비되는 대목이죠. 박물관은 다음 세대를 낳고 기르며 가정은 물론 사회적 역할까지 수행하는 위대한 여성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전쟁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포스터들이 여럿 걸려 있다.
▲ 베트남 여성박물관 전쟁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포스터들이 여럿 걸려 있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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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에서 희생을 마다않은 여성들

베트남 여성의 대단함은 특정 세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여성' 코너에서 다루듯,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한 두 차례 인도차이나 전쟁 과정에서 여성이 감당한 역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을 잃은 수많은 여성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일부는 직접 전쟁터로 나아갔고, 그보다 많은 수가 가정과 삶의 터전을 지켰습니다. 남자가 비운 자리에서 역할을 다한 여성들의 삶은 고스란히 문화로 이어집니다. 베트남을 모계사회로 오해하는 이가 생길 만큼 베트남 가정 내에서 여성의 결정권이 강해진 건 이때부터였다고 합니다.

4층 전시실은 통째로 '여성의 의복'에 주어졌습니다. 베트남 내엔 54개에 이르는 민족이 있는 만큼 이들의 다양한 의복과 장신구를 모아 전시합니다. 이 전시실에 모인 다양한 의복은 베트남 내 소수민족의 복식을 보려는 이들에게 또 다른 즐길거리를 선사합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이들을 모아둔 '베트남의 어머니들' 전시관.
▲ 베트남 여성박물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이들을 모아둔 "베트남의 어머니들" 전시관.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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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이를 압도하는 베트남의 어머니들

여성박물관 내엔 베트남을 대표하는 여성 백 명의 사진과 약력 등도 전시돼 있습니다. 사업가와 과학자, 활동가, 교육자 등 오늘날 베트남 사회 각층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베트남 여성의 얼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성박물관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건 '베트남의 영웅적 어머니들(Heroic Mother of Vietnam)'입니다. 베트남 국회는 지난 2008년 전쟁으로부터 둘 이상의 자식을 잃거나 독자를 잃거나, 남편과 아이를 함께 잃은 여성을 베트남의 영웅적 어머니로 지정해 기리기로 합의했습니다.

표창을 받은 이는 무려 5만 명 가까이가 되었고, 이들 중 열 명의 자식과 손자 두 명을 잃은 호찌민시티의 응우옌 티 란(Nguyen Thi Ranh) 등의 사진이 이곳에 전시돼 있습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들의 사진을 보다보면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큰 절망을 남기는지가 생생히 다가오는 듯합니다.

여성박물관을 나오며 저는 베트남을 조금은 더 이해한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하노이를 찾는다면 반드시 이곳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여성박물관, #여행기, #김작가 여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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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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