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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8일- 5월12일까지 46일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 중 Via de la Plata를 걸은 체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연재합니다.[기자말]
'22년 5월 5일 까미노 39일차
xunqueira de ambia-> ourense 22.4km
 
동트는 모습이 아름다워 대체로 출발을 일찍 하는 편이다.
▲ xunqueira의 아침 동트는 모습이 아름다워 대체로 출발을 일찍 하는 편이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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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 침대에서 잠이 깬 나는 주변 2층 침대들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하나도 없다. 순례자들이 다 출발하고 나만 남은 줄 알았다. 아래 침대 옆 콘센트에 휴대폰을 충전시켜 놓은 상태라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놀란 마음에 사다리도 제대로 밟지 않고 미끄러지듯이 후다닥 내려와서 휴대폰 시계를 보니 4시 50분이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위층 침대엔 사람이 없었던 거였다. 출발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고 다시 올라가서 눕는다고 잠이 더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조용히 짐을 챙겨서 응접실로 나갔다. 거기에는 며칠 전 알베르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한국인 '정'님이 있었다. 그는 일찍 자고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비야에서 출발할 땐 알베르게에 혼자 혹은 두서너 명이 묵을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순례자가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가는 알베르게마다 순례자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좀 적을 만한 곳으로 경로를 바꿔야겠다고 말한다. 그런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게도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에 걷다보면 흔히 마주치는 풍경
▲ 아침숲 아침에 걷다보면 흔히 마주치는 풍경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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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출발하고 난 후 30여 분 뒤 7시 가까이 되어 출발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닷새 뒤엔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아주 긴 거리를 걸어왔는데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발에도 물집 하나 잡히지 않고 무사하다니 자신도 놀랍다.

무거운 배낭을 한 번도 배달로 부치지 않고 오롯이 내 한 몸으로 견뎌내며 걸어서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시작할 때의 걱정과 달리 잘 걸어온 이유 중의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 속도에 신경 쓰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걸으려 노력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오늘 걷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비해 중간마다 바르가 많은 경로이다. 그만큼 대도시 부근이라는 얘기일 수도 있다. 오늘 걸을 거리의 절반쯤인 12km 지점쯤에서 바르에 들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8km쯤 걸었을 때 순례길 옆 바르에서 얼마 전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진'님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를 보더니 커피가 맛있으니 쉬어가라고 권한다. 못이기는 척 배낭을 내려놓았다. 바르에 들르면 대체로 맥주를 마시는 편이었지만 맥주를 마시기엔 너무 빠른 9시쯤이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눴다.
  
스페인에서 흔하게 본 양귀비꽃. 들판에도 집근처에도 흔히 피어 있다.
▲ 길가의 양귀비꽃 스페인에서 흔하게 본 양귀비꽃. 들판에도 집근처에도 흔히 피어 있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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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님과 대화하면서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 둘이 얘기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오우렌세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엔 이미 배낭이 도착한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체크인 후에 세탁한 옷을 테라스 난간에 널었다.

얼마 후 자원봉사자인 오스피탈레로가 오더니 테라스에 널지 말고 지하 1층에 있는 빨랫줄에 널라고 한다. 다른 알베르게에서는 별다른 지침이 없었는데 오우렌세는 대도시라 다른 모양이다.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오는 날이 많기 때문에 지면에서 띄워서 창고를 짓고 이곳에 곡물을 저장한다고 한다. 설치류의 침입도 막고 적당히 환기도 되어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 오레오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오는 날이 많기 때문에 지면에서 띄워서 창고를 짓고 이곳에 곡물을 저장한다고 한다. 설치류의 침입도 막고 적당히 환기도 되어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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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는 짐을 풀고 바로 내게 오더니 산티아고부터 피니스테레까지 90여km를 더 가고 싶은데 나보고 가능하냐고 묻는다. 이번이 두 번째 순례인 그녀는 몇 년 전 까미노에 왔을 때 버스를 타고 갔던 것이 아쉬워 이번에는 걸어서 가보고 싶다고 했다.

1000여km의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90여km를 더 걷겠냐고?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그러려면 10일로 예정했던 산티아고 도착을 하루 당겨서 9일까지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 3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날도 3일이나 되는데 과연 내게 그럴 힘이 남아 있을까?

만약에 내가 피니스테레를 가지 않는다면 산티아고에서 사나흘을 휴식도 취하고 관광도 하면서 친구를 기다려야 할지, 대도시인 마드리드에 가서 친구가 피니스테레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다음 여행지를 친구와 같이 떠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이글레시아 산타 마리아
▲ 산타마리아 성당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이글레시아 산타 마리아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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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민을 눈치챘는지 안드레이(까미노 중후반에 종종 함께 걸었던 루마니아 청년)가 내게 와서 와인을 마시러 나가자고 권한다. 그를 따라나섰다. 알베르게 앞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와인 1잔씩 주문했다. 그는 피니스테레까지 함께 갔으면 좋겠다면서 경로와 그에 따른 거리가 적혀 있는 지도를 내게 보여주었다.

난 메모지에 내일 (5/6)부터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5/9일까지 걸을 거리,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5/10)에서 피니스테레(5/12)까지 사흘 동안 걸을 거리를 정리했다.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고 막연하게 걱정했던 것이 좀 해결된 느낌이었다. 진정하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아까 놀랐던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남은 7일 중의 5일은 30~33km씩을 걸어야 하는데 가능하겠지?

지금까지 잘 걸어온 걸 보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다리를 믿어보자. 아마도 39일 동안 걸으며 순례자 자세로 몸이 바뀌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같이 걷는 순례자들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고 걸은 것처럼 남은 기간도 순례자들 간의 격려와 믿음 속에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나흘 더 걷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보자. 안드레이의 설명이 내게 격려가 되었다.

태그:#피니스테레, #오우렌세, #알베르게, #산티아고데콤푸스텔라, #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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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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