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9 21:42최종 업데이트 22.10.1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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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고문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6월 항쟁 34주년을 맞은 2021년 6월 10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박종철 열사의 추모 공간이 마련돼있다. 509호는 박종철 열사가 경찰 물고문을 받다 숨진 조사실이다. ⓒ 공동취재사진


남영동 대공분실에 간 적이 있다. 인권 교육 투어였다. 한국에서 벌어진 참혹한 고문의 흔적을 톺아보자는 내용이었다. '놀러' 가지 않은 관광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수록 대공분실이 정말 굉장하다고 느꼈다.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계단,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진 출입문, 일부러 좁게 낸 창문, 세심하게 설치된 조명, 잘 계산된 공간들. 구석구석이 목적에 최적화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을 설계한 김수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라고 불렸다. 그는 다른 건물을 설계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공분실에도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았다. 건물의 목적, 즉 고문에는 어떤 철학을 지녔는지 몰라도.


몇십 년이 지난 후에야 건물을 돌아보던 나는, 자꾸 현실감을 잃었다. 안내판의 내용을 자세히 생각하기에는 너무 끔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입하거나 상상하기를 무의식적으로 그만두었다. 그냥 천재의 천재성에 감탄하는 정도로 투어를 끝내고 싶었다.

신기한 경험을 했다며 그날을 이야깃거리로 삼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 못했다. 강산이 변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는 그때 회피했던 공포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래도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깊은 두려움은 아니다. 당시 나는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는 관광객이었다.

김초엽이 쓴 '다크 투어리즘' 
 

김초엽 <므레모사> ⓒ 현대문학


김초엽의 <므레모사>를 처음 읽었을 때는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개념이 신기했다. 이는 재난, 학살,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는 관광을 말한다. 미국의 9‧11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캄보디아의 집단매장지 '킬링필드' 등이 주요 관광지다. 모두 죽음과 슬픔으로 이름을 알리고, 기억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므레모사>를 두 번째 읽으니 나의 경험도 다크 투어리즘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대공분실 자리에도 민주인권기념관이 문을 열 예정이다. 시설 소개에는 이런 글이 있다. "아픔을 기억하며 희망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기념시설입니다."

<므레모사>에서 주인공 유안을 포함한 관광객 일행을 이끄는 가이드는, 참사에도 죽지 않았던 '불멸의 나무'를 희망의 상징이라고 소개한다. 그 나무들은 화재에 직격 당하고도 살아남았다. 일행이 간 국가 '이르슐'은 원인불명의 화재로 대규모 참사를 겪었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공장과 연구소가 폭발하고, 그곳의 유독성 물질이 온 사방에 퍼져, 인간과 동물이 떼거리로 죽었다.

이르슐은 외부에 원조를 요청하는 대신 상황을 숨기고 출입을 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행은 처음으로 이르슐의 재난 지역에 관광 허가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르슐 내에 있는 귀환자들의 마을 '므레모사'를 향한다. 참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다. 비극 가운데에도 희망이 있다는 상징이다.

일행의 직업은 제각각이다. 관광학 연구자, 취재기자, 다크 투어리즘을 즐기는 투어리스트, 관광 동영상을 제작하는 스트리머 등, 이들은 각자의 목적을 갖고 투어를 신청했다. 어떤 이는 므레모사에 '좀비'들이 산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알고 싶어 한다. 아니면 사람들이 품은 비극에서 위안이나 배움을 얻으려 한다. 혹은 특별한 경험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공통점이라 하면, 모두 므레모사를 구경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다크 투어리즘 관광객이라 해도 기본 태도는 다른 관광객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사자 혹은 거주자만큼 비극에 압도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위한 배움을 얻으려 한다. 경험을 얻은 뒤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관광객은 외부인이다. 재난 지역을 보는 자는 그곳에 사는 자가 아니다. 

주인공이 '일어서길' 바라는 사람들

다만 주인공 유안은 조금 입장이 다르다. 유안은 자기 자신이 관광지가 된 사람이다. 일행이 므레모사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평을 하듯, 사람들은 유안의 삶을 이러쿵저러쿵 평가한다. 유안은 뛰어난 무용수였으나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덕분에 의족을 다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재활 훈련사인 한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무용이 가능할 정도로 기능을 회복한다.

다시 무용수가 된 유안은 자신의 사정을 알리는 방송에 출연한다. 유안은 비극을 팔아 돈을 충당하는 데 수치심을 느끼지만, 방송 이후 들어온 돈으로 치료비를 마련한다. 자신의 몸을 다크 투어리즘 지역으로 제공한다.

유안은 다리를 의식할 때마다 격한 통증을 느낀다. 유안에게 움직임은 곧 고통이다. 그런데 관객들은 유안이 비극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춤추기를 바란다. 춤추어라. 멈추지 말아라. 고통받아라. 그렇게 유안이 비극을 딛고 일어나 멋지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유안을 구경하며 감탄하고 싶어 한다. 나중에 유안의 연인이 된 한나 역시 유안이 원래대로 무용수가 되기를 바란다.

유안이 무용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사랑한다. 한나는 유안에게 반복해서 말한다. 움직이라고, 나아가라고, 지향하라고. 한나에게 유안의 결손은 섹시한 것이다. 재난 현장이 매력적인 관광지로 다듬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안의 비극은 즐길거리가 된다.

그러니 관광객의 관심은 일방적으로 쏟는 사랑과 같다. 이는 상대방에게 환상을 씌우고, 그 환상을 사랑하는 일이다. 정답을 정해두고 멋대로 기대하며,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켜줄 자극을 구하는 일이다. 관광객은 정작 살아 꿈틀거리는 실체에서는 한 발짝 물러난다. 슬픔과 두려움에 이입하는 대신 뒷걸음질을 친다.

관광객의 시선은 불균형하다. 자신이 관심 있는 모습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방적으로 관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나는 유안의 고통을 무시하고 유안이 활동을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유안은 비극에 묵념하는 대신 므레모사에서 다른 방식의 삶을 찾기를 기대했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나아가지 않으며, 지향점이 없는, 따라서 고통도 없는 삶을 보길 바랐다. 

비극인 동시에 평범한 일

다만 작중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관광객은 자극을 바라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자극적인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을 수가 없다. 살아있으려 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관심에서 탈주한다. 유안이 한나의 사랑에서 빠져나왔듯, 므레모사 역시 쉽게 붙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므레모사에서는 거주자가 여행자를 관찰한다. 관광객의 시선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거주자의 시선이 있다.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강력하고 압도적인 사랑이다. 므레모사의 비극은 유안 일행을 일방적으로 사로잡는다. 므레모사의 귀환자들은 시선의 전향, 전유, 전복을 행한다.

유안은 므레모사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다. 덕분에 유안은 일행과 달리 귀환자들과 쌍방향의 교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선택은 여전히 유안이 자기 마음대로 상상한 결과"(<우리는 SF를 좋아해>, 149쪽)다.

소설 전체에 걸쳐 관광객, 므레모사, 유안, 유안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교차하지만 상통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이다. 쫓고 쫓기고 도망치고 붙잡으려 하는 행위의 연속이다.

다만 그것은 평범한 일이다. 생명력 뒤에 넘실거리는, 혹은 생명력을 넘실거리게 하는 죽음과 슬픔을 단번에 직시하는 자는 많지 않다. 그에 붙들리면 자신이 힘겨워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남의 비극에서 탈주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수많은 추모와 기억과 기념관이 가치를 지닌다. 기념관은 사람들이 차마 외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둔 장소다. 함부로 외부인인 척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공간이다. 재난이 낳은 잔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다크 투어리즘에서는 자기 생활로 돌아가려는 관광객과 그들을 끈질기게 붙잡는 기억 사이에 경합이 일어난다. 기억의 조각들은 산 채로, 죽은 채로, 혹은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속삭인다. 잊지 말아라. 떠나지 말아라. 삶과 죽음의 무게를 생각해라.

유안은 이에 응답해 있는 힘껏 므레모사를 사랑한다. 환상과 기대와 갈망을 담아 므레모사를 응시한다. 앞서 말했듯 이는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자기만족이다. 그래도 우리는 비극 가운데에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붙들고 붙들리는 행위가 끝나지 않는 한 사랑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 이어지는 한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할 것이다. 비극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그림자를 느낄 것이다.


므레모사

김초엽 (지은이), 현대문학(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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