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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 버려진 감들. 상주군에서 흔히 보는 풍경 중의 하나.
 도로변에 버려진 감들. 상주군에서 흔히 보는 풍경 중의 하나.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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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 상주군 화서면 - 성주군 성주읍 (75km)] 
자전거 국토종주를 하는건지,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건지 


이날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고갯길과 사투를 벌인 하루였다. 이들 고갯길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라, 등산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예 고개 초입에서부터 자전거에서 내려 핸들을 끌고 올라갔다. 대부분 길고 가파른 고개였다. 산을 내려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산을 오르느라 숨이 가빴다.

처음 맞닥뜨린 고갯길은 산골 주민들이 이용하는 농로이자 임도였다. 그 길을 마주하는 순간 의심이 들었다.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어 내비게이션을 여러 번 들여다봤다. 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산비탈을 이리 저리 굽이돌며 올라갔다. 그 길 중간에 '태풍 힌남로 때문에 산사태가 발생해 도로가 유실'됐고, '복구는 미정'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현수막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흘린 땀이 얼만데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시 후, 길 오른쪽에 작은 현수막이 하나 더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현수막에 '임시 개통'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개통 현수막을 걸었으면, 중단 현수막을 떼든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자전거 정도는 통행이 가능한 길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오르다 보니, 그 길이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 중턱을 더듬어 오르는 고갯길. 가파르고 길다.
 산 중턱을 더듬어 오르는 고갯길. 가파르고 길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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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높고 가파른 길이었다. 주변에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길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카카오맵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길까지 찾아내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길로 설정했지,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하는, 갖가지 생각이 드나들었다. 한편으로 앞서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넘어갔을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이 고갯길은 내려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흙길에 미끄러지기 쉬운 데다 굴곡도 심했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도 끌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을 내려와서는 한참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날은 이 고개 외에도 백마산을 비롯해 '백'자로 시작되는 산만 3개를 넘었다. 내가 자전거 국토종주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때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이 결코 최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주군의 4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
 성주군의 4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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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의 한 내리막길. 갓길도 없고, 도로 표면은 갈라지고 패이고, 상처 투성이다.
 성주군의 한 내리막길. 갓길도 없고, 도로 표면은 갈라지고 패이고, 상처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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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 성주군 성주읍 - 밀양시 하남읍 (87km)]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멈추는 순간, 길을 잃다


애초 계획했던 대로라면, 부산에 도달해야 하는 날이다. 하지만 계획은 마치 계획이라도 했던 것처럼 어그러져, 여전히 부산과는 한참 떨어진 도로 위를 달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체력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몸이 장거리 주행에 적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내일 정오 무렵 부산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계속 오류가 발생했다. 주행 중에 잠시 멈춰 섰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로가 바뀌었다. 굳이 경로를 바꿔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바뀐 길을 가다 보면, 애초 가려고 했던 길과 다시 만났다. 거리를 단축하는 경로도 아니었다. 결국 왜 길이 바뀌었는지 확인하느라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길이 중간에 끊어지거나, 아예 막다른 길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낙동강 둔치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길이 사라진 걸 확인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은 물속을 향하고 있었다. 길이 있어야 할 곳에 강물이 출렁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강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많지 않았다. 마침 근처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어 물어봤다. 낚시꾼들 말이 예전에는 여기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4대강 사업으로 물속에 잠겼단다.

4대강 사업이 언제 적 일인가? 10년도 넘었다. 그런데 카카오맵은 어떻게 물속으로 사라진 길을 지금까지 지도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일까? 카카오맵은 언제 이 길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까? 이런 길이 과연 여기뿐일까? 그러고 보니 이틀 전, 잡초로 덮여 짐승조차 지나다닐 수 없는 하천 둑방 위로 나를 인도한 게 그냥 단순한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었던 거다. 이런 내비게이션에 계속 의지해서 가야 하나, 고민이었다.
 
안개가 걷히자 모습을 드러낸 옛 삼랑진교.
 안개가 걷히자 모습을 드러낸 옛 삼랑진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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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은 오후 4시경에 찾아왔다. 낙동강 위로 다리 하나를 건넌 다음 잠시 멈춰 서서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이에 내비게이션이 갑작스럽게 작동을 멈췄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카카오맵에 너무 불만을 표시한 나머지, 카카오맵이 나란 인간의 심리까지 꿰뚫어보고 아예 서비스를 중단한 줄 알았다.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 판교데이터센터에 화재가 발생해서 생긴 일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멈추는 순간, 길을 잃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지, 자전거를 끌고 주변을 서성이던 사람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양산 가는 길을 아느냐'고. 나 역시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네이버를 뒤졌다. 하지만 네이버는 카카오만큼 세밀하지 않아서, 겨우 겨우 길을 더듬어 찾은 끝에 이날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마치 카카오맵을 성토하기 위해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카카오맵이 제공하는 자전거 내비게이션은 상당히 유용했다. 내 눈에, 내비게이션이 이용자들을 좀 더 빠르고 안전한 길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빠르지만 위험한 길과, 느리지만 안전한 길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간혹 오류가 떴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정밀하게 움직였다. 사실 이 물건이 없었다면, 더 자주 더 먼 길을 헤매며 돌아다녔을 수도 있다.
 
낙동강 강변을 달리는 2인승 자전거.
 낙동강 강변을 달리는 2인승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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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 : 밀양시 하남읍 - 부산시 구포역 (53km)]
떼지어 다니는 자전거... 이렇게 반가울 수가 


국토종주 마지막 날, 낙동강 위로 안개가 자욱했다. 어쩌다 5일 동안 2번이나 안개에 갇히는 일이 발생했다. 해가 떴는데도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출발을 늦췄다. 하지만 마냥 늦출 수 없었다. 그렇게 길 위로 올라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비게이션이 안개가 짙게 깔린 다리 위를 건너라고 지시했다. 조금 위험하다 싶었다. 우회로를 찾아봤지만, 다리를 건너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었다. 차량이 끊어진 틈을 타 다리 위를 질주했다. 다행히 그 사이 내 뒤를 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안개가 짙은 탓인지 헬멧에서 이슬 같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차 싶어 자전거를 세우고, 어깨에 가로매고 있던 카메라를 들여다봤다. 카메라 몸체 표면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안개 때문에 카메라가 젖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습기로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사진을 저장한 메모리 카드에 문제라도 발생하면 낭패다. 서둘러 카메라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 가방에 담았다.
 
낙동강변 자전거도로 위, 줄지어 달리는 자전거들.
 낙동강변 자전거도로 위, 줄지어 달리는 자전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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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읍을 떠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낙동강 자전거도로를 타기 시작했다. 안개가 깔린 자전거도로 위로 수많은 자전거들이 출몰했다. 한강 자전거도로에서 보는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오래간만에 떼를 지어 다니는 자전거들을 만나게 돼 꽤 반가웠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안개를 뚫고, 연달아 두 쌍의 나이든 부부가 2인승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것이다. 아침 운동 삼아 자전거를 함께 타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정겨웠다.

안개는 오전 9시가 돼서야 걷히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맑고 푸르렀다. 그 하늘 아래 양산시 황산공원으로 휴식을 즐기러 나온 수많은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서서히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한강을 떠나, 강변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된 게 5일만이다. 그 사람들과 함께 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사력을 다한 끝에 국토종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오후 1시경, 드디어 부산시 경계를 넘어섰다. 그 길로 바로 구포시장을 찾아가 손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온 몸에 나른한 기운이 몰려왔다.
 
양산시 황상공원, 붉게 물들어가는 댑싸리 밭.
 양산시 황상공원, 붉게 물들어가는 댑싸리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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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종주를 마치고 

12년 전 처음 미니벨로를 타고 국토종주를 할 때, 내가 간 길을 따라서 자전거도로가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꼭 내가 간 길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꼭 부산과 서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자전거를 타고 이 땅 어디든지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했다. 최소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며 자전거를 타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4대강 사업과 함께, 4대강을 따라 자전거도로를 만든다고 했을 때, 어쩌면 그런 생각이 단지 나만의 희망에 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대강 자전거도로는 도로에서 자전거를 밀어내는 정책이었다. 도로는 자동차에게 내주고 자전거는 자전거도로로만 다녀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이후로, 실제 그런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한다고 하면서 지자체들이 앞장서 자전거도로를 개설했지만, 그건 단지 시류에 편승한 보여주기식 사업에 불과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4대강 사업처럼 자전거를 도로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 붉은 색을 칠하고 그 위에 하얀색 자전거 마크를 새겨 넣는다고 해서 자전거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도는 오로지 보행자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처음 국토종주를 나섰을 때와 다름없이, '도로'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너무 무색했다. 여전히 인도는커녕 갓길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도로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도로에서 자전거 통행을 고려한 흔적을 찾는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공무를 수행한다는 사람들이 자전거가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한 교통수단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분명했다.
 
양산낙동강교 아래, 휴식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
 양산낙동강교 아래, 휴식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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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지구를 살리는 일곱 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 위대한 발명품이 아직까지도 도로 위에서 배척을 당하고 있는 데 마음이 무거웠다. 국토종주가 끝나갈 무렵,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도로 위를 달리는 장거리 주행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힘든 것도 있지만, 1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도로 위에서 자전거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오히려 더 줄어들고 있는 걸 발견하고 의욕이 꺾인 탓이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국토종주는 이렇게 우울한 결말로 끝을 맺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즐거웠던 기억이 더 많았다는 걸 되새길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힘들었던 기억들이 눈 녹듯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결국엔 힘들었던 그 기억들마저 국토종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게 분명했다. 당장에, 한계에 부딪히고 마지막엔 그걸 넘어섰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나이는 들었어도 '자전거 국토종주'는 여전히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모험' 중의 하나였다.

태그:#자전거 국토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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