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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전북 완주군 동상면. 동상국민학교 후원회장 최영열(1920년생)은 식전부터 관내 유지들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다. 동상국민학교 교장실에 관내 유지들이 얼추 모이자 최영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르신네들을 이렇게 모이시라고 해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장 선생님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긴급히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교장 조인봉(가명)이 설령 실정법을 위반했다 하더라도,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학교의 대표자이기에 하루속히 석방되어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전주경찰서에 조인봉의 석방을 탄원하는 대표자로 이날 모임을 주선했던 최영열, 동상면사무소 부면장 박병두, 동상면 대표적인 유지인 이석주(1903년생) 등 5명이 뽑혔다. 이석주는 후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완주을구'에서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인물이다.

대표자들은 전주경찰서로 가 경찰서장에게 읍소했다. 하지만 경찰서장은 냉랭하기만 했다. "조인봉은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좌익이요. 풀어줄 수 없소!" "서장님. 하지만 동상국민학교 교육은 어떻게 합니까? 저희 얼굴을 봐서라도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보증을 서시오." 그렇게 해서 조인봉은 지역내 우익인사들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조인봉은 다시 경찰에 끌려갔다. 

완주군의 모스크바

"교장 선생님이 또 잡혀갔다네." "이번에는 재판도 받게 생겼다는구만" 조인봉이 좌익사건에 연루돼 전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이 동상면에 급속히 퍼졌다. 이에 동상면 소재지인 신월리 주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상면에는 유독 교회가 많아 지역 유지들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고, 관내에 이러저러한 유지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해방 후 동상면에서 이렇다 할 좌우익 투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인봉의 선고공판이 있었던 1948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판결문에 의하면 조인봉은 1946년 10월 1일부터 동상국민학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같은 해 10월 하순 남로당에 가입하였고, 1948년 6월 21일 이래 남로당의 동상면 위원장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1948년 8월 22일 면당(面當) 부서 개편 등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불법 회합을 하였으며, 그해 8월 25일 북조선 해주에서 개최되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판사는 조인봉에게 '군정계획 방해기도 위반'으로 징역 5개월 및 벌금 2000원을 선고했다.(조○○의 전주지방법원 판결문, 1948년 10월 8일)

조인봉이 중심이 되어 완주군에 남로당 조직을 만들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투쟁계획을 세웠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는 집회나 관공서 파괴 등 물리력 행사는 없었다. 다만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할 대의원을 선출하는 '지하선거' 계획을 논의했을 뿐이다. 어쨌든 한국전쟁 발발 전 동상면은 '완주군의 모스크바'로 불리울 정도로 남로당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민학교 교장이 남로당 동상면당위원장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땅문서도 빼앗겨

최영열의 아버지 최원칠은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들 최영열이 분주소(인공 치하 지서)에 붙잡혀 간 지 며칠 만에 집안 머슴도 면당사무실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1950년 6.25 발발 후 인민군은 7월 20일 완주군을 점령한 후 각 읍면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노동당을 복구했다. 완주군 동상면당 사무실은 면소재지인 신월리 정순학의 빈집에 설치되었다. 여기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방침도 결정되었다. 물론 인민재판이 있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인민위원회가 최원칠 집의 머슴을 끌고 간 것은 그 집의 재산 규모를 파악하고 혹시나 은닉재산이 있는지 알아내려는 속셈이었다. 다음 날 아침 당에서 보낸 이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이불, 옷가지는 말할 것도 없고, 솥이며 그릇까지 가재도구를 마당으로 끄집어냈다. 다락에 있던 논 50마지기(10,000평=33,000㎡) 문서는 압류대상 1호였고, 소는 2호였다. 소가 2호였다고는 하지만, 논은 부동산이었고 소는 현물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소는 한두 마리가 아닌 53마리나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최원칠은 지주인데다가 장남 최영열은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기에 동상면에서 부자는 대표적인 유지였다. 그들은 보릿고개 시절에는 보리와 쌀, 하지감자를 소작농과 빈농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나마 아버지 최원칠은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3~4일 후 최원칠은 면당사무실로 호출돼 심문을 당했다. 하지만 최원칠은 "사상이라는 것은 부자간에도 다르다. 나는 당신들 편이다"라고 둘러댔다. 마을 사람들에게 춘궁기에 그가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인민군은 그를 풀어주었다.

앞서 전쟁이 일어나자 면내 유지들과 피난짐을 쌌던 최영열은 부모와 자식들이 눈에 밟혀 전주에 도착하기 전 산속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같이 가던 이들에게 "안 되겠어요.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와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그는 어둠이 캄캄해져서야 집에 도착했다. 며칠 만에 부모와 자식이 만나니 마냥 행복했지만 가슴 한켠에는 불안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새벽에 지방 좌익들은 최영열 집을 포위했다. 그렇게 끌려간 그는 동상면 사봉리 묵계마을 작은번개골에서 총살당했다. 1950년 10월 30일의 일이었다.
 
최영열이 학살된 장소(최영열의 아들 최귀호)
 최영열이 학살된 장소(최영열의 아들 최귀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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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열이 죽기 한달여 전 동상면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동상면장 김태환과 의용소방대장 박용순(1902년생), 각각 반공청년단과 대한부인단 간부였던 박수림(1915년생)과 김성녀(1903년생)는 1950년 9월 26일 밤과 27일 새벽 사이에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게 붙잡혀 면사무소 창고와 동상분주소로 연행됐다. 이후 이들은 괴비소(골짜기 이름), 동상지서 부근 밭, 동상국민학교 뒷산, 구석들 등에서 학살당했다. 피해자들의 사체는 음력 8월 17일, 돌로 타살(打殺) 혹은 총살된 상태로 유가족에 의하여 발견, 수습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 보고서>) 이들이 학살된 동상국민학교는 지금은 수몰된 상태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자로 진실 규명한 13명의 피해자 중 11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그 예로 김태환(1914년생)은 면장이면서 신월교회 집사였고, 다른 이들 대부분도 교회 목사, 장로, 집사 등이었다. 왜 한국전쟁 전 좌우 갈등이 격하지 않았던 완주군 동상면에서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유지들은 남로당 활동을 한 교장 조인봉의 구명운동까지 벌이지 않았나?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찾을 수 없다. 단지 완주군 동상면은 국민학교 교장이 남로당 면당위원장을 할 정도로 좌익조직이 튼튼하게 구성돼 있었고, 좌우간의 정치적 갈등과 지주 및 유지와 소작농 간의 계급 갈등이 잠복해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적대시하는 기독교(인)라는 모순이 중첩된 것으로 보인다.
 
동상면 기독교인들이 희생된 것을 추모하는 순국비
 동상면 기독교인들이 희생된 것을 추모하는 순국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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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수당한 국민학교 교장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인공시절 초기에 사회주의 정책 입안을 위해 토지개혁 등의 정책을 밀어부쳤고, 이에 저항할 이들을 '반동'으로 규정해 숙청했다. 또 인민군 후퇴기(UN군 수복기)에 지방좌익들이 우익들을 집단 학살했는데 동상면에서는 조인봉이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증언했다. 

미군이 노획한 빨치산 문서를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영인본으로 묶었는데 여기에 동상면 신월리 출신의 <유광식 자서전>이 있다. 유광식은 1951년 12월 6일 작성한 글에서 조인봉이 동상면 당부위원장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 2』

조인봉과 지방 좌익들은 동상면 우익들을 학살한 후 마을 청년들을 소집하여 진안, 주천, 용담 방향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그 청년들 중 일부가 탈출하여 마을로 되돌아왔고 인민군의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조인봉도 이후 마을로 되돌아왔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조인봉을 포함한 지방 좌익들은 동상면의 대부산과 대둔산에 입산해 빨치산 활동을 했다. 조인봉은 1952년 가을 최후를 맞았다. 토벌대는 인민군 출신 전향자 박〇〇을 앞세워 조인봉이 은신한 비트에 들이닥쳤다. 동상면과 진안군 주천면 경계에 위치해 있는 장군봉에서였다.

완주유족회장 최귀호(1940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조인봉은 체포 직전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은 면소재지로 옮겨져 목이 잘렸고 하루씩 밤티마을, 시평, 신사봉, 원사봉, 묵계, 거인리에 효수되었다. '빨갱이 대장의 최후는 이렇다'고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조인봉을 붙잡는 데 큰 역할을 한 이는 전주경찰서에 정식 채용돼 이후 동상지서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완주군 동상면에서는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 가을부터 시작된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지역의 주민들이 합법적 절차 없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질 수는 없지만,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이 이후 공권력에 의한 학살의 빌미를 제공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태그:#완주군, #기독교인, #민간인학살, #좌우적대, #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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