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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이란 사람이 있었다. 김포에서 강화도로 오가는 배를 부리는 사공이었던 손돌에게 어느 날 큰 손님이 찾아왔다. 왕을 강화도로 모시라는 엄명이 손돌에게 내려졌다. 때는 고려 제 23대 왕인 고종 시절이었다.

나라에 난리가 났다. 왕은 강화도로 몸을 피하려고 궁을 떠났다. 배를 타고 강화로 가려는데 사공이 물살이 잔잔한 곳을 두고 부러 물살이 센 곳으로 배를 몰지 뭔가? 저 놈이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물살이 센 곳으로 배를 몬다고 오해한 왕은 사공을 즉각 처단하려 했다.

'손돌목'의 전설

죽음을 눈앞에 둔 손돌이 왕에게 사정을 한다. "전하, 저를 죽여도 좋사옵니다. 하오나 이 물길이 염려스러우니, 제가 이 바가지를 물에 띄우겠습니다. 이 바가지를 따라 가십시오. 그러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의심이 들어서 손돌을 즉결 처형했지만 물살이 센 강을 건널 길이 막막했던 왕은 손돌이 띄운 바가지를 따라가서 무사히 강화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제야 손돌을 처형한 일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용두돈대'.
 '용두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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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광성보 앞 바다에는 손돌의 이야기를 담은 전설이 내려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건너온 건 맞지만 개경에서 강화로 오는 가장 가까운 곳인 승천포구를 두고 굳이 한참 아래쪽인 김포의 덕포진을 택했을 리는 만무하다. 어쨋든 전설은 그렇게 전해 내려왔다.

손돌의 전설이 내려오는 '손돌목'은 물살이 세다. 물이 들고 날 때면 거센 물살이 용트림하듯 세차게 흐른다. 이렇게 물살이 센 곳에 붙이는 '~목'은 강화의 손돌목 말고도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지형상의 이점을 잘 활용해서 왜적을 물리쳐 없앤 울돌목(명량)이 그중 가장 유명하다.

울돌목은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가장 좁은 부분의 너비가 330미터 정도인데 물살이 빨라 초속 6미터의 속도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해서 10여 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31척의 적선을 격파하여 크게 이겼다.

강화 광성보 앞 바다인 손돌목도 이에 버금갈 정도로 좁고 물살이 센 해협이다. 그에 더해 조수 간만의 차이도 큰데다 군데군데 암초도 있다. 그러니 이 좁은 해협을 거슬러 오르내리거나 건너다니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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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의 돈대들

지난 8월 말, 광성보를 찾아갔다. 사적 제 227호인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광성보에는 광성돈대와 손돌목돈대 그리고 용두돈대가 있다. 이 돈대들은 모두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강화에는 조선시대 관방 유적인 돈대가 54개나 있다. 관방(關防)이란 국경인 변방의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를 뜻하는 말이다. 돈대는 강화 해안에 축조한 소규모 성곽으로 해안의 관측과 방비를 담당했다. 특히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인 강화해협과 북쪽의 조강을 따라 돈대를 많이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한양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광성보의 세 돈대들도 강화해협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숙종 5년(1679)에 돈대를 만들었지만 실제적으로 그 돈대들이 제 역할을 한 것은 병인년(1866)과 신미년(1871)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신미년에 양이들이 침입했을 때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에 속해 있던 돈대들은 치열한 전장이 되어 이 강토를 지켜냈다.

1871년 6월 1일, 미 아시아함대의 '조선원정대'가 강화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들은 1866년에 대동강에서 불 태워졌던 미 상선 '제너럴 셔몬호'의 책임을 묻고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군함 5척과 해군 1200여 명으로 이루어진 미 아시아함대는 남북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병사들도 다수 섞여 있는 정예병들이었다.
 
신미양요 때 포격에 파괴된 손돌목돈대와 전사한 조선군들.
 신미양요 때 포격에 파괴된 손돌목돈대와 전사한 조선군들.
ⓒ 국외소재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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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미 아시아 함대와 맞붙어서 죽음으로 항전한다. 당시 강화도 해안에는 대포를 설치해둔 포대들이 여럿 있었고 군사들 역시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미군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남북전쟁을 치른 경험도 있는 미군에 비해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일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기 역시 보잘것 없었다. 비록 몇 년 전(1866년)에 프랑스군을 격퇴시킨 경험은 있었지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조선군은 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라에서는 어제연 장군을 진무영 중군(鎭撫營中軍:정3품)으로 임명하고 강화로 급히 내려 보낸다. 어제연 장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광성보에 진을 치고 전투에 임했다. 미군과 조선군은 치열한 포격전을 펼쳤다. 이 포격전이 얼마나 격렬했으면 탐사대장으로 나섰던 미국 해군 중령 블레이크는 "이처럼 좁은 바다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토록 집중 포격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남북전쟁에서도 이런 포격은 당해보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화력의 열세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군과 미군 사이의 최초 전투였던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분전했지만 그것은 미군에게 위협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군의 화력이 보잘것 없다는 것을 노출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미군은 열흘 뒤에 또 다시 강화도 상륙작전을 결행한다. 1871년 6월 10일, 미군 함대는 해병대와 해군 650명을 태우고 다시 초지진 앞에 나타났으니 이른바 '신미양요'가 바로 그것이다.

광성보에서 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은 미군을 만나 분연하게 항전했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적의 함포를 맞은 진지(돈대)는 부서지고 불타올랐으며 최신예 무기 앞에 군사들은 쓰러져 갔다. 그래도 누구 하나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은 목숨을 다해 싸웠다.
 
광성돈대
 광성돈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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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에서의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들은 광성보 진중(陣中)에 게양되어 있던 조선군 대장(大將)의 군기(軍旗)인 '수자기'를 끌어내리고 대신 성조기를 달았다. 다음 날인 6월 12일 아침에 미군은 강화해협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광성보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간 조선군의 시신만이 무너지고 깨진 광성보를 지키고 있었다.

150여 년 전 그때를 떠올리며 광성보의 '손돌목돈대'를 둘러봤다. 손돌목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한 돈대로 광성보 동남쪽의 완만한 능선 위쪽에 위치해 있다. 규모는 남북 30m, 동서 34m에 둘레가 108m로 둥근 모양의 돈대다.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였으며, 그때 파괴되어 방치된 것을 1976년 전적지보수정화사업을 거치면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손돌목돈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용두돈대가 있다. 용두돈대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암반 위에 위치해 있는데 생긴 모양새가 꼭 용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두돈대다. 대부분의 돈대가 1개의 문과 3~4개의 포좌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용두돈대는 포좌와 출입문 시설이 따로 없다. 또 규모도 일반적인 돈대에 비해 작다. 손돌목돈대가 바닷가에 접해있지 않고 내륙 쪽에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용두돈대를 새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광성보에는 이 두 돈대 말고도 '광성돈대'가 또 있다. 광성돈대도 여타의 돈대들과 마찬가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지만 1918년에 제작된 강화도 지형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로 봐서 광성돈대는 신미양요 때 파괴되고 방치되어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는 이미 멸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성돈대는 1976년 전적지보수정화사업 때 복원되었다.
 
손돌목돈대의 포안으로 바라본 강화해협.
 손돌목돈대의 포안으로 바라본 강화해협.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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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27호인 광성보 안에 있는 세 군데의 돈대를 살펴보았다. 세 곳 모두 말끔하게 정돈되어 과거에 이곳이 치열한 전장이었다는 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신미양요의 용장인 어재연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비각과 무명용사들의 무덤인 '신미의총'이 없었다면 이곳이 격전지였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우리는 무명용사들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으랴. 그러나 병사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결연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했을까. 내 나라, 내 강토를 지키는 길이 곧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길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처절하게 싸웠으리라.

미군도 인정한, '장엄하게 숨진 애국자들'

조선원정대에 참여했던 미 해병대 슐레이 대령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에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부상자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조선군은 낡고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도 미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어갔다. 아마 우리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신미의총'. 신미양요 때 장엄하게 숨진 무명 용사들을 기리며 묵념을 올렸다.
 '신미의총'. 신미양요 때 장엄하게 숨진 무명 용사들을 기리며 묵념을 올렸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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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 없는 무기를 가지고도 적과 맞서 용감하게 싸운 조선 군사들을 보며 미군은 부끄러웠다. 그들은 전투에 이겼지만 그 승리가 자랑스럽지가 않았다. "우리가 전투에는 이겼으나, 아무도 이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전투를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1년의 조선 원정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전이다. 우리는 물리전에서는 이겼지만 정신전에서는 졌다"라고 기록했다.

해마다 음력 사월 스무 나흗날(5월 말경)이면 광성보에서는 '광성제'가 열린다.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과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을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그날 그 순간만은 손돌목의 거센 물살도 조용히 흘러갈 것이고 초여름 한낮의 땡볕도 다소곳해질 것 같다.

용두돈대 여장에 몸을 기대고 발아래 손돌목을 내려다본다. 물살은 예나 다름없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맨 주먹으로 적과 싸운 선조들의 처절한 분전을 손돌목의 물살이 증언을 하는 듯했다. 

<손돌목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53-1
- 입지 : 광성보 동남쪽 완만한 능선 상부에 위치
-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 규모 : 너비- 동서 34m, 남북 30m. 둘레 - 108m. 복원 성벽 높이 - 2.6m 
- 형태 : 원형
- 문화재 지정 여부 : 비지정
- 보수 이력 : 1976년 복원
- 시설 : 문 1개, 포좌 3개, 여장


<용두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4
- 입지 : 손돌목돈대 남동쪽 해안 돌출부 끝단
- 축조 시기 : 1860~1870년대(?)
- 규모 : 너비- 동서 28m, 남북 11m. 둘레 - 66m. 복원 성벽 높이 - 3.8m 
- 형태 : 타원형
- 문화재 지정 여부 : 비지정
- 보수 이력 : 1977년 복원


<광성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 입지 : 강화해협 방향으로 돌출된 곶의 능선 위에 입지
- 축조 시기 : 1679년(숙종5)
- 규모 : 너비- 동서 35m, 남북 51m. 둘레 - 143m. 복원 성벽 높이 - 3.5m 
- 형태 : 복원 전 원래 모양 확인 불가
- 문화재 지정 여부 : 비지정
- 보수 이력 : 1976년 복원
- 시설 : 복원된 문 1개, 포좌 4개, 여장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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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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