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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되기 전의 동상국민학교 터(출처- 진실화해위원회)
 수몰되기 전의 동상국민학교 터(출처-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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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소개령에 따라 전북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주민 60여 명이 군인들에 의해 고산면 소재지로 끌려간 뒤에도 일부 주민들은 마을에 남아있었다. 8사단 군인들은 빨치산 출몰 지역인 완주군 동상면을 이참에 아예 싹쓸이할 생각이었다. 그 첫 단계가 집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동상국민학교도 교실 한칸만 남기고 불탔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주민들은 모두 남아있던 동상국민학교 교실에 수용됐다. 교실에 있던 이들 모두 불안에 떨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상황을 예측한 이는 없었다. 당시 상노인에 속했던 성판용(당시 64세)은 아내 박순림과 딸 성삼례와 함께 교실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교실에서 보낸 다음 4월 29일에서야 밖으로 나왔다. 

논 앞에 세워진 이들을 기다리던 것은 군인들의 총구였다. 주민 30여 명은 짚단 쓰러지듯 논바닥에 널부러졌다. 그 와중에 성판용은 용케 총알을 피해갔지만 지금 일어나면 하늘나라로 직행할 것 같아 꼼짝 않고 있었다. 그가 실눈을 뜨고 있는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검을 꺼내든 군인들이 시신에 다가가 머리통을 붙잡고 '쓱쓱' 한 다음 무언가를 집어 드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군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귀가 들려 있었다. '저 악마들이 뭔 짓을 벌이는 거지?'라는 생각도 잠시, 군인이 자신에게 향함을 직감한 성판용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군인은 한 손으로 성판용의 귀를 잡고 날카로운 대검 날을 들이댔다. 군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슥슥' 생살이 잘려지는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성판용은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천당과 지옥이 오가고 별이 반짝이고 노랑색과 빨강색이 명멸했다. 귀가 잘려 나간 부위에서는 피가 한정 없이 쏟아졌다.

"모두 (귀가) 몇 개인가?"라는 군 장교의 물음에 "31개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군 제8사단 21연대 7중대가 이날 미군사고문단(KMAG)에 보고한 정기정보 요약문은 다음과 같다.
 
"291800. 7th Company 21st Regiment reported to have killed an estimated 31 partisans at Shinwol CQ4679."
"291800. 21연대 7중대가 신월 CQ4679(신월리 원신마을)에서 추산 31명의 빨치산을 죽였다고 보고하였다."(8사단 정보 요약)
 
8사단 소속 군인들은 어떠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민간인 31명을 학살해놓고는 미군에게는 빨치산을 죽였다고 허위보고한 것이다. 증거물로는 주민들의 귀가 제출됐다. 당시까지 살아있던 성판용의 귀를 포함한 주민들의 31개 귀가 바로 그것이다. 

악귀의 현장에서 기사회생으로 살아남은 성판용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대검에 잘린 귀로 인한 과다출혈로 그는 얼마 후에 사망했다. 그의 처와 딸은 이미 학살되었다. 시신들 위로 까마귀가 날아들어 주검의 눈을 쪼아먹기도 했다.

스스로 구덩이 파고 학살당한 주민들

동상국민학교에서 주민들이 숨지기 나흘 전에도 사건이 있었다. 1951년 4월을 전후로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등지에서는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국군 토벌대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4월 25일 신월리 원신마을 주민 60여 명이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완주군 고산면으로 끌려갔다. 고산지서에 넘겨진 주민들은 일주일 넘게 조사를 받았다. 유치장이 좁아 이들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조장에 구금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빨치산이 아니었고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하거나 도움을 준 일도 없었다. 결국 일주일 후에는 모두 석방됐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석방된 지 몇 시간 안 돼 이들이 다시 지서로 호출됐다. 그런 후에 주민들은 두 대의 트럭에 실려 운주면 방향으로 이동됐다. 시동을 걸기 직전, 고산면에서 치안대 활동을 하던 친척의 도움으로 일가족 4명이 호출(?)되어 트럭에서 내렸다. 동상면 대아리 은천마을 출신의 어머니와 딸 둘, 아들이었다.

이후 운주면 경천저수지에 도착한 주민 40여 명은 인근에 구덩이를 팠다. 자신의 무덤이 될 곳을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판 꼴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8사단 군인들에 의해 인근 화산면 성북리에 매장되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빨치산 물이 들었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산악지역인 완주군 동상면은 빨치산 출몰지역이었다. 전적비 앞에 선 이는 최귀호 완주군 유족회장.
▲ 6.25참전 전적비 산악지역인 완주군 동상면은 빨치산 출몰지역이었다. 전적비 앞에 선 이는 최귀호 완주군 유족회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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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식사하세요." "뭐라고?" "식사하시라고요!" "일 하라고?" "...." 손경용의 아들 손승길(1945년생)은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 손재화에게 '식사하시라'고 말하다가 목이 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전 손경용 집안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논 1500평(4,950㎡), 밭 500평으로 농사거리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황소가 한 마리가 있었던 데에다 동상면 소재지에서 유일하게 공무원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손경용은 면사무소, 동상국민학교, 지서 직원들 밥을 해주었다. 잠까지 자는 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지만 관내 공무원 식사까지 했기에 돈벌이가 쏠쏠했다. 일거리가 많아 옆집 아가씨를 고용할 정도였다.

여유롭게 살던 손경용 집에 먹구름이 낀 것은 한국전쟁이 나면서부터였다. 8사단의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동상면 신월리 원신마을 주민 대부분은 피난을 갔다. 하지만 고령이라 피난을 가지 못한 손재화는 불탄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작은아들 집터 위에 움막을 짖고 1950년 겨울을 보냈다. 동장군이 그의 몸을 꽁꽁 얼렸지만, 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1951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노인 손재화가 괭이로 밭을 일구는데, 신작로를 행군하던 군인들이 발걸음이 멈췄다.

"저 노인은 뭐야? 트럭에 태워!" 장교의 지시에 사병들은 손재화를 트럭에 던지듯이 실었다. 트럭이 한참을 달려 완주군 고산면 삼거리에서 잠시 정차하고 사람들을 더 태웠다. 트럭이 출발할 때,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손재화가 입을 열었다. "용목골 모자리(못자리의 방언)는 언제 할 거냐?" 동상면 신월리 집 앞에 있는 논 못자리가 걱정이 된 것이다. 저승사자를 만나기 직전까지 농사일을 걱정하는 순진한 시골 촌로다웠다.

못자리를 걱정하던 손재화는 그날 40여 명의 동상면 주민들과 함께 경천저수지 근처에서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날 희생자 중에는 손재화의 작은아들 손경찬도 있었다. 그는 평소 의용소방대 활동을 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피난 길에 합류하지 못했다. 그가 학살 터로 끌려 온 경위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결국 아버지와 한 장소에서 눈을 감게 됐다.

"움직이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

사랑방에 마실 간 이기순은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두 사람을 잘 묻어 주었구만" "잉. 잘했구마이."

완주군 화산면 한 농가의 사랑방에서 나눈 얘기의 골자는 화산면의 한 노인이 한국전쟁 때 군인에게 학살당한 두 사람의 시신을 정성껏 매장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기순이 자세히 들으니 매장된 이 중 한 명이 자신의 장인 손경용(동상면 신월리 원신마을)을 일컫는 것 같았다.

사위 이기순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손경용의 아내 최용회는 남편과 같이 죽은 김진돌의 아내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고산면 삼계리를 지나 화산면 종리 현장은 이기순이 안내했다. 손경용과 김진돌이 묻혀 있다는 곳을 파헤치던 두 여성과 이기순은 지쳐버렸다. 허리 높이까지 팠지만 유해와 유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여가 아닌가?" "여기라 했습디여." 장모의 물음에 사위가 답했다.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는 터라, 세 사람은 다시 괭이와 삽을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하던 이기순의 손끝에 뭔가 촉감이 전해졌다. "장모님, 뭐가 걸리는데요" "잉!" 그때부터는 맨손으로 흙을 파헤쳤다. 혹시나 유해가 훼손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던 손에 뼈가 만져졌다. 장신이었던 김진돌의 유해가 먼저 드러났다. "아이고!" 김진돌 아내의 곡이 터졌다. 잠시 후 손경용의 유해도 드러났다. 보통 키에 앞니가 빠져 있던 손경용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1956년 두 여성은 완주군 화산면 종리에서 자신들의 남편 유해를 수습했다.

그렇다면 손경용은 어떻게 해서 이곳에 묻혔을까? 손경용은 1951년 4월 말 경천저수지 근처에서 8사단 군인들에게 학살된 손재화의 아들이다. 손경용은 평소 기관지 천식이 있어 기침을 달고 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들이 동상면 신월리에 왔을 때 골방에 숨어 있던 그는 기침을 못 참고 인민군에게 적발되었다. 인민군에게 끌려간 그가 고산면 삼거리를 지나 화산면에 다다랐을 때였다.

빨치산 토벌에 나선 8사단 군인들은 적들이 이동한다는 정보를 듣고 빨치산 뒤를 쫓았다. 그러다 군인들의 총구에 불이 뿜었고 총알은 손경용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 자리에서 1~2일 신음하던 그는 눈을 감았다. 1951년 11월 5일의 일이다.

동상면 소재지에서 공무원들 밥을 해주고 작은 농토에서 성실히 일하던 손재화와 두 아들 손경용과 손경찬은 1951년 한 해에 죽임을 당했다. 당시 동상면 신월리에서는 움직이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피난 가지 못해 누워 있던 노인들과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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