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6 16:12최종 업데이트 23.02.02 10:32
  • 본문듣기

반포한강공원에서 바라본 노을 ⓒ 성낙선


한낮의 강렬했던 열기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가을날 저녁. 한강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해가 지고 난 뒤의 서쪽 하늘로 보랏빛이 길게 띠를 이루며 지나가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어서 얼른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지만, 그때 그 순간 내 두 눈으로 보는 그 하늘빛을 온전히 옮겨 담을 수는 없었다.

해가 지면서 저녁 어스름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거무룩한 산책로 위로 사람들의 그림자마저 깨끗하게 사라졌다. 서쪽하늘을 물들였던 보랏빛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한강에서 바라보는 저녁하늘이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저녁하늘과는 사뭇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한강에서 해가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저녁노을을 감상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성수대교 위로 번지는 노을. 해가 지면서 구름 사이로 햇빛이 솟구치고 있다. ⓒ 성낙선

 
한강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본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 꽤 오래다. 그동안 아침저녁으로 한강 자전거도로를 이용해 자전거 출퇴근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동안 해가 뜨고 지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됐을 테니, 서쪽하늘을 다채롭게 물들이는 저녁노을 또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보고 지나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는 저녁노을이 내게 그처럼 강한 인상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는 저녁노을 또한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내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의 반복에 불과했다. 강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자명한, 자전거 바퀴를 둥글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문의 여지가 없는, 그래서 뭐 하나 특별히 되새길 만한 것이 없는 그런 일들 중에 하나였다. 그저 '오늘도 또 서쪽으로 해가 지는구나' 하고 곁눈질로 쳐다보고 무심결에 지나쳤던 게 거의 전부였다.
 

멀리 산 위를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 양화대교 근처. ⓒ 성낙선

 
도시에 살면서 저녁노을을 감상하는 일이 쉽지 않다. 아침에는 일을 하러 나가기에 바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쁘다. 내 경우도 다르지 않다. 종종 한강을 따라서 자전거 출퇴근을 하면서도 자전거 핸들에 부착한 속도계를 주시하면서 시종일관 속도를 점검하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시간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나도 한때 '속도'에 미쳐 살았다. 그때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시간을 얼마나 앞당겼는지를 확인하는 게 내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그런 이유로,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철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색깔로 해가 지는 광경을 목격했을 텐데도 별 감흥이 남아 있지 않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높은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살아왔고 그만큼 시간도 절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 한강에서 차분히 저녁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소박한 시간마저 빼앗기고 살아온 꼴이라니... 속도가 경우에 따라서는 '시간'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우 다채로운 풍경의 한강 저녁노을
 

올림픽대교와 한강변 건물들을 데칼코마니로 만든 노을. ⓒ 성낙선


저녁노을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로 '낙조'니, '황혼'이니 하는 단어들이 있다. 그 단어들에서 왠지 쓸쓸하고 외로운 정경이 떠오른다. 저녁에 해가 지면서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왜 그처럼 스산하고 시린 정서를 느껴야 하는 걸까? 낙조와 황혼은 어딘가 모르게 뒤이어 다가올 어둠을 강하게 의식한 데서 생겨난 단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사실 그 단어들이 품고 있는 의미대로, 떨어지고(낙) 저무는(혼) 풍경을 바라보면서 유쾌하고 따뜻한 감성을 느끼는 게 더 이상하다. 황혼은 심지어 '이별' 내지는 '소멸'을 표현하는 문구에 사용될 때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노을이라는 우리말에 좀 더 강한 애착을 느낀다. 노을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그 때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하늘이 붉게 물든 현상 그 자체를 가리킨다. '아침노을'이든 '저녁노을'이든, 노을이라는 단어에서 떨어지고 저무는 의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낙조하면 자연스럽게 '서해 낙조'를 떠올린다. 서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어느 지역의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니까 그곳에 꼭 한 번 가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설령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해를 가게 되면, 은연중 한 번쯤 낙조는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서해안에 무슨 무슨 낙조마을, 무슨 무슨 낙조전망대 하는 명칭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런지 서해 낙조는 좀 더 특별할 거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는 빌딩들. 그 사이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다. 원효대교 북단에서 바라본 풍경. ⓒ 성낙선

  
서해 낙조가 아름다운 건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쪽 하늘로 해가 지는 풍경을 보려면 꼭 서해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강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서해 낙조만큼이나 아름답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하일 수도 있다. 때에 따라서, 또는 보는 장소에 따라서 내가 접하게 되는 풍경에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강에서 보는 저녁노을은 그 풍경이 매우 다채롭다.

한강에서는 태양이 지는 공간을 특정하기 어렵다. 태양이 때로는 빌딩 사이로, 때로는 다리 위로, 때로는 먼 산 너머로 미끄러지듯이 넘어간다. 그때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모두 다 다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이고 강이고 뭐고 전부 다 붉게 물들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가슴이 뭉클하다. 하루를 이토록 아름답게 막을 내릴 수 있게 해준 데, 감사하다. 그때는, 해가 저문 뒤에 찾아오는 어둠마저 따뜻하다.
 

여의도 63빌딩에 비친 황금빛 노을. ⓒ 성낙선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