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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손승길(1945년생) 가족은 전북 완주군 동상면 동상국민학교에서 탈출하듯이 나온 후 동상면 신월리 솔정이라는 굴로 피신했다. 민가에도 없는 식량이 산속 굴에는 당연히 없었다. 손승길과 어머니, 누나들과 젖먹이 손승식은 내리 굶어야만 했다. 굴에 있는 3박 4일 동안 그들은 식량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조차 먹을 수 없었다.

"승길아, 오줌이라도 싸봐라." 먹은 게 없으니 소변이 나올 리 없지만 승길이는 용을 썼다. 소년 승길이가 한참 용을 써서 오줌이 나오자, 미리 바가지를 댔던 어머니는 최용회는 자녀들에게 한 모금씩을 먹였다. 승길이도 마셨다. 

마냥 누워 있다가 굶어 죽을 수는 없어 최용회는 자녀들을 데리고 옆 산의 다른 굴로 갔다. 하지만 그곳이라고 먹을 것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5일째 들어서 모두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 최용회는 비상식량으로 챙겼던 생쌀을 떠올렸다.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생쌀을 먹는데, 막내 승식(1948년생)이에게 탈이 생겼다. 이가 막 날 때였던 아기가 생쌀을 씹지 못해 항문이 막힌 것이다. 

아기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어머니는 피울음을 삼켰고, 아기의 누나들과 형은 주먹만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아기를 인근 야산에 묻고 나서 며칠 후였다.

가슴으로 총구 막은 어머니

"승길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굴 밖으로 나간 소년은 군인들과 맞닥뜨렸다. 소년 승길의 뒤를 따라 나온 가족들도 군인들의 총구에 기겁했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신발이 벗겨진 것을 뒤늦게 안 승길이가 굴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군인들이 굴속으로 총질했다. 

최용회 가족은 동상면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는 8사단 군인들에게 발각돼 금산군 진산면 방향으로 연행됐다. 맨발이었던 소년은 엄마가 이불을 뜯어 만들어준 발싸개를 한 발로 부지런히 쫓았지만 계속 뒤로 쳐졌다.

"이놈의 새끼, 빨리 안 가!" 군인의 총구에 떠밀려 가는 손승길은 눈물 반 콧물 반이었다. 군인들이 자꾸 뒤로 쳐지는 소년을 바위 위로 올렸다. 군 장교의 턱짓에 사병이 총구를 소년에게 겨냥했다. 사시나무 떨듯 하는 소년이 오줌을 지리는데, 엄마가 군인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총구를 잡아 자기 가슴에 대었다. "야가 우리 집의 유일한 남자요. 지발 살려 주씨오."

최용회의 남편 손경용은 인민군에게 끌려가다가 토벌대에게 사살당했고, 시아버지 손재화는 1951년 4월 25일 토벌대에게 연행되고 일주일 후에 완주군 운주면 경천저수지 근처에서 학살되었던 터였다. 둘째 아들 승식이도 굶어 죽었기에 최용희 집안에 남자라고는 손승길만 남았다.

총부리를 무서워하지 않는 엄마의 힘은 위대했다. 동상면 일대에서 피 냄새(?)를 숱하게 맡은 군인들이었지만, 소년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엄마에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죽는다  

동상면의 유일한 풍금이 동상국민학교에서 신월리 원신월마을 손경용 집으로 옮겨진 것은 1950년 8월이었다. 한국전쟁 후 인민군이 완주군 동상면에 진주하면서, 여맹(여성동맹)은 면내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소년 승길이는 처음 보는 풍금의 반주에 노래 부르는 것이 신났다.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국군이 수복하고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부역혐의자에 대한 처벌과 빨치산과 협조자에 대한 토벌 작전이 본격화됐다.

국군 8사단 소속 군인들은 동상면 신월리 일대의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동상국민학교로 모이게 했다. 당시 학교는 모두 불타고 교실 한 칸만이 멀쩡했다. 손경용의 아내 최용회가 4명의 자녀를 데리고 학교로 간 때는 1951년 4월이었다. 30여 명의 주민이 교실에서 생활하는데, 최용회의 큰딸 손정순(당시 15세)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엄마는 우리를 왜 이리로 데려왔어요?"라며 화를 냈다. "그게 뭔 소리여 시방. 군인들이 이리로 전부 모이라니께 온 것이지" "엄마는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죽는다'는 소리도 못 들었나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는 딸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 우째야 쓰까?" "딴 곳으로 가요." 결국 엄마는 딸의 말대로 동상국민학교를 나와 동상면 신월리 '솔정'이라는 굴로 들어갔다. 최용회 가족이 교실에서 나온 지 한 시간 후에 8사단 군인들이 들이닥쳐 살육전을 벌였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주민 30여 명을 총살하고 죽은 이의 귀를 잘라 상부에 전과로 보고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51년 4월 29일, 최영회가 맏딸의 말을 무시하고 학교에 주저앉았다면, 국군 제8사단 21연대 7중대가 미군사고문단(KMAG)에 보고한 '31개의 귀'는 '36개'가 될 뻔했다.

씨받이 된 어머니
 
증언자 손승길(손경용의 아들)
 증언자 손승길(손경용의 아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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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장수경찰서에서 취조받던 최용회 가족이 풀려났지만,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그때 웬 노파가 나타나, 최용회에게 나긋나긋하게 대했다. 노파를 따라간 후 이산가족이 됐다. 딸 둘은 장수군 천천면에 식모로 갔고 최용회 모자만이 그 노파 집에 남겨졌다.

알고 보니 노파는 최용회를 씨받이로 들인 것이었다. 노파의 아들은 병에 걸려 피똥을 싸지르는 환자였다. 최용회가 그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경제활동은 노파의 몫이었는데, 주로 밀주를 담아 팔았다. 엄마와 의붓아버지 사이에 자식이 생기자 손승길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소년 손승길은 하루 주요 일과가 산에서 나무를 해 나르는 일이었다. 이후 경찰의 밀주 단속에 적발된 의붓아버지 집안은 하루아침에 망했고, 얼마 안 돼 최용회는 자식 둘을 데리고 동상면 신월리로 발걸음을 향했다.

소년 손승길은 동상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에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렵게 국민학교를 졸업한 손승길은 돈을 벌어가며 중앙강의록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러던 중에 산판(山坂) 일하던 웬 사내가 소년의 집에 꿰차고 들어앉았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은 산악지대로 나무를 베어 파는 산판 일이 번성했다. 그 사내는 집주인 행세를 하더니 집안 재산을 날름날름 팔아먹었다. 그는 손승길의 어머니 최용희에게 술장사를 시켰다. 소년은 의붓아버지의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술장사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술장사 그만두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라고 극언을 퍼부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최용희는 술장사를 계속했다.

좌절한 손승길은 마을 인근 30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미련 없이 뛰어내렸다. 두개골이 벌어진 소년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참이 지나 정신이 드는데 머리가 깨질 듯했다. 15일 만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년의 머리는 풍선만 했고, 바지까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소년이 지팡이를 잡고 문밖출입을 하는 데에는 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연이어서 온다던가.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작은누나가 동생 모습을 보고 미쳤다. 부족한 것 없이 평화롭게만 살던 손승길 집안은 한국전쟁기에 두 명이 국가공권력에 목숨을 잃었고, 손승길의 동생은 굶어 죽었다. 손승길 어머니의 삶은 한국전쟁기에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고달픈 삶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때 손경용이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면'이란 가정을 해 본다. 그때 손경용이 불법적인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의 집안에 수십 년간 드리워진 불행의 먹구름은 여전했을까? 손승길 가족이 겪은 상처와 고통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관련기사 : "움직이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 노인과 환자도 예외없었다 http://omn.kr/21jsy)

태그:#오줌, #동상국민학교, #총구, #씨받이, #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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