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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사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스콧 니어링의 반려자인 헬렌 니어링은 스콧 니어링이 자유 의지로 곡기를 끊어 마침내 육체의 껍질을 벗어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한 자유죽음의 모습은 죽음을 맞이하는 이와 떠나 보내는 이 모두에게 평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도 스스로 곡기를 끊어 더 고통스럽기 전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두 죽음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죽음의 자기 결정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디까지가 소설이야? 
 
가난과 고난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최현숙 첫 장편소설
▲ 황노인 실종사건 가난과 고난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최현숙 첫 장편소설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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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생활관리사인 최현숙이 <황노인 실종사건>(글항아리)이라는 소설을 펴냈다. 추리소설을 연상시키지만 자전적 르포문학에 가깝다. 작가 자신이 생활관리사로 빈곤 노인을 살피고 관리하는 것이 직업이기에 어디까지 허구이고 어디가 사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생활관리사의 시각으로 황문자라는 86세 노인의 죽음 선택 과정과 공영장례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김미경이라는 생활관리사가 자신이 관리하던 86세 황문자 노인이 연락이 끊긴 것을 알게 된것부터 시작된다

"끈내두한댈거업서요인저미안해요"

황노인이 사라졌다! 황노인이 미경에게 남긴 문자는 자살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족을 책임질 일 없는 지금이 가장 만족스럽다던 노인이고 쾌활한 성격이라 자살할 거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단순 실종일 것일까?

황문자는 김미경의 생활관리대상자였다. 김미경의 구술생애사 대상 중 한명이기도 했고 거의 원고가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

황씨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과 굴곡의 현대사를 살아낸 가난한 도시 빈민의 전형이다. 문맹으로 경제력 없는 무능한 남편과 자식 넷, 친정어머니를 먹여 살리느라 닥치는대로 밥벌이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낸 빈곤한 독거노인이다. 황노인 주변인물 역시 가난하고 비루하고 고난에 찬 삶을 끈질기게 버티며 사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노인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자신이 만든 부조리까지 보태 징그럽게 버티며 수레를 밀어가고 있다. (21쪽)
 
김미경이 들여다 본 노인들의 삶은 가난하고 비루하고 외롭고 고독하며 죽음이 코 앞에 닥친 상황이지만 끈질기게 생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김미경에게 가난과 고난 고통을 듣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삶의 동력이자 설렘이다.
 
나는 왜 가난과 고난을 고통을 듣고 관찰하고 쓰는가? 아니 그전에 왜 쓰고 싶은가? 이 의심이 이른 아침 황노인의 안부를 확인하러 가는 미경의 동력이고 자살 예고일 수도 있는 문자를 읽으면서 무의식중에 솟아오른 심란함과 설렘의 이유다. 이번엔 심란해서 더 설렌다. 터놓고 말해 남의 심란함이다. 자신은 당하지 않으니 잘 관찰하고 기록하면 된다. (51쪽)
 
미경은 산 사람에게 보기 좋게 죽으라는 존엄한 죽음과 안락사 가족주의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고유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미경의 생각이다. 미경이 자유죽음을 인정하고 미경 자신도 자식이 있음에도 공영장례를 택하려는 이유다.
 
인간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고유의 권리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연민은 혐오의 이면이며 틀에 박히고 게으른 고정관념이다. (52쪽)

죽음이라는 절호의 기회

황노인의 실종은 실종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한 자유죽음을 선택한 여정이었다. 황노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의지로 자유죽음을 결정하고 실행한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만족한 자기결정을 한 황노인 영정 옆에 <축하합니다>라는 구술생애사 헌정은 적절해 보인다.
 
황노인은 무슨 이유로 죽음을 결단했을까. 회귀 불가능한 경계를 스스로 넘어서는 결행에 대해 산 자가 충분히 추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자유의지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어떤 '자유'도 사회 구조와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자유죽음은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비참이나 자괴감과 직결된 예방해야 할 '자살'이 아님은 명확하다. 모든 죽음에 대해 개안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를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은 산 자들의 사회를 위한 질문이고 의논이다. (282쪽)
 
내 나이 예순 중반, 이제 삶보다는 죽음이 가까이 와 있는 나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기에 나 또한 죽음에 대한 미경의 시각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나의 삶과 죽음이 구태여 사회적 통념과 남의 눈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의식도 없고 그저 소통도 움직임도 없는 상태에서 끝내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견딜수 없는 고통 속에서 온갖 사회적 차별과 편견, 연민을 감내하며 비루한 삶의 끈을 끝끝내 놓지 않는 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본인 스스로 본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무연고자나 시가족이 시신 인양을 포기할 경우에만 이용한다는 공영장례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다. 사람들을 모아 죽음을 알리고 뼈가루를 항아리에 담아 대리석으로 덮어 두고 1년에 한 두 번 찾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죽음이야말로 작가의 말대로라면 '가족의 애착이자 족쇄'를 끊어내고 진정으로 자기다워질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작가는 자신의 도벽의 습성대로 남의 삶을 훔쳐보고 그 삶을 글로 옮겨 밥과 약을 벌던 염치없음으로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역사를 끝까지 노려볼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훔쳐보기와 글쓰기로 이웃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이어지길 기다린다.

황 노인 실종사건

최현숙 (지은이), 글항아리(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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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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