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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걸음과 시선이 가만히 마음 준 것들을 다시 한 자리에 묶는다. (...) 아직은 남아 있는 내 안의 우물 (...) 나는 언제까지 시인일까. -'시인의 말' 중에서
▲ 김은숙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부끄럼주의보>  오랜 걸음과 시선이 가만히 마음 준 것들을 다시 한 자리에 묶는다. (...) 아직은 남아 있는 내 안의 우물 (...) 나는 언제까지 시인일까. -'시인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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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주의보

상당산성 터널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푯말 하나가 들어왔다

부끄럼 주의
속도를 줄이시오

굽이굽이 급경사 급커브 길을 돌아서자
오른쪽에 또 보이는 큰 표지판

부끄럼주의
사고 많은 곳

출퇴근길 매일 보는 미끄럼주의가
부끄럼 주의로 읽히는 여름

길가에 늘어선 저 달맞이꽃처럼
고스란히 어여쁜 부끄럼이라면
그래 어쩌면 속도를 줄여야 할 듯

위험한 급경사 급커브 굽이 길 저 언덕배기에
연노랑빛 얼굴 못 들고 고개 살짝 돌리는
그야말로 순정의 부끄럼이라면
어쩌면 어스름한 달무리 아래에서
사랑 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도

아하 그래서
부끄럼 주의
한여름의 달맞이꽃


부끄럼주의보가 뭐지? 했다가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재밌는 시다. 시적 화자가 '미끄럼'을 '부끄럼'으로 오독해서 탄생한 이 시는 "어쩌면 속도를 줄여야 할 듯"이란 시구가 주는 사회적 경고나 교훈보다는 "연노랑빛 얼굴 못 들고 고개 살짝 돌리는/그야말로 순정의 부끄럼"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빙긋이 웃었을 뿐이다. 부끄럽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뒤 몇 편의 시를 더 읽고 난 뒤 부끄럼은 내 것이 되었다.

우주의 또한 계절이 지나는 지점
세상의 빛이 줄어드는 것을
돌아올 수 없는 빛의 길을 가만히 바라본다
눈빛 오래 가닿은 지점에 서늘히 마음도 머물러
흐릿하게 아득하게
맑아지는 눈
-시 <물끄러미> 전문


부끄럼이 내 몫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돌아올 수 없는 빛의 길을 가만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올 가을에 오로지 색(色)에 빠져 단풍 구경하느라 "세상의 빛이 줄어드는 것을" 인식조차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과연 시인인가? 좋은 시를 읽다보면 나는 어떻게 시를 써야하는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또 이 시는 어떤가?

가을 산성을 거닐어 보니 알겠네
아무렇지도 않은 이별은 없다는 것을

상수리나무 아래 떨궈진 열매들 오도카니 모여
땅 밑 뿌리의 말에 귀를 대고 있네
-시 <작별의 자세> 부분


자칭 산책가인 내가 가을 산성을 거닐어 본 것이 한두 번일까? 하지만 나는 "상수리나무 아래 떨궈진 열매들 오도카니 모여/땅 밑 뿌리의 말에 귀를 대고 있"는 광경을 한 번도 목도한 바 없으니 어찌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한 편의 시를 통해 나를 돌아보며 나의 무딘 감각을 수선하는 노력조차 않는다면 나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내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산책을 하는 것도 어쩌면 나를 수선해서 잘 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도 훌륭한 마음의 산책이라 할 것이다. 다음 시를 보자.

새끼발가락을 다치고야 안다/아랫것의 힘//가장 밑바닥에서/온몸을 떠받치고 있는/보이지 않는 저 밑 아랫것들//(...)//어찌 발가락뿐이랴/아랫것이 저 아랫것들이라고/참 함부로 무시되던 이들이/가장 밑바닥 저변이 되어/세상을 받치고 지탱하는 숨은 힘이었음을//(...)//눈에 띄지 않게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며/가지런히 쌓은 저 단단한/아랫것의 힘
-시, <아랫것들> 부분


서안나 시인은 시집의 해설에서 "지층과 맞닿아 있는 혹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아랫것"에서 시인은 "세상을 받치고 지탱하는 숨은 힘이었음" 발견한다고 전제하면서, 시인의 "아랫것"의 힘을 발견하는 경로는 곧 "내전(內戰)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내전이란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일까?

시집을 읽는 동안 유난히 내 눈에 띈 단어가 있다. 고요다. 고요라는 말이 편하게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고요가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뒤에 오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김 시인은 "멀리/멀리라는 말/오래, 오래라는 말이/수북이 쌓여가는/그 숲에서 나는/한 그루 고요"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멀리'와 '오래'라는 부사에서 생의 노곤함이 느껴진다. 그 노곤함이 고요가 되는 비결을 시인은 이미 터득한 듯하다. 그 비결의 요체는 무엇일까? 시의 뒷부분을 읽다보면 그 답이 찾아질 것도 같다.

그 먼발치에
한 잎 잎으로
떨어져 누워도 좋겠다
한 잎 잎으로
여기저기 날리다가
그저 묻혀도 좋겠다
-시 <먼발치> 뒷부분


김은숙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지금도 청주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이생을 건너가신 아버지"의 짐을 대신 지고 "밤새 어머니 밭은기침 소리"를 들으며 살아오는 동안 "새벽녘 내 베개에는/눈썹 몇 개 가지런히 누워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득한 등은 쓸쓸하기만 하여/비탈진 시간/마당 한쪽이 캄캄했던" 그 시절의 노곤함이 그녀의 시를 담금질하기도 했으리라.

김 시인은 반평생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명예퇴임하고 지금은 지역 문학을 위해 열일을 하며 애쓰고 있다. 1996년 <오늘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아름다운 소멸>, <손길>, <부끄럼주의보>, <그렇게 많은 날이 갔다> 등 6권의 시집과 산문집 <갈참나무 숲으로>를 펴냈다. 제13회 내륙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부끄럼주의보

김은숙 (지은이), 문학의전당(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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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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