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생전 여러 편의 소설을 집필한 작가라 해도 특히 마음이 쓰이는 작품이 없을 리 없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박완서에게도 그런 소설이 몇 편쯤 있었다. 그녀는 2014년 쓴 <그 남자네 집> 머리말에서 이 소설이 동명의 단편 '그 남자네 집'에 기초하고 있다고 밝힌다. 단편으로 발표한 뒤 연작으로 몇 편을 이어 쓰고픈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느꼈고' 마침내 장편이 되었다는 게 이 소설의 탄생 비화라 하겠다.

<그 남자네 집>은 제목에서부터 박완서의 작품 가운데 독자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받는 1997년 작 '그 여자네 집'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모두 진전되지 못한 사랑을 다뤘단 점에서 다분히 엮이는 부분이 많아 더욱 그렇다. '그 여자네 집'이 전쟁이 갈라놓은 관계와 이뤄지지 못한 애정의 애틋함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봐 더욱 먹먹하게 한다면, 이 소설은 전후 급변하는 사회상 가운데 인간 삶의 복잡다단한 면모들과 엇갈린 관계가 주는 감흥을 전한다.

한국 최초 문예지를 창간한 현대문학사 50주년에 맞춰 박완서는 이 소설을 발표해 헌정했다. 그것이 어찌나 감동적인 것이었는지 현대문학사는 지난해에도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새로 단장해 발표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나온 이 책을 독자들은 처음처럼 다시 반겼다.

삶의 본질을 은근히 건드리고 에둘러 지나가는 이 능청스런 소설에 대하여 새 시대의 독자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군부대에서 일했던 작가 스스로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됐으니, 다른 소설보다도 한 발짝쯤 더 삶에 다가서 있음이 분명하다.
 
책 표지
▲ 그 남자네 집 책 표지
ⓒ 현대문학

관련사진보기

 
한국문학계가 그리워하는 작가, 그 자전적 소설

주인공인 나는 이웃에 살던 먼 친척 뻘 젊은이 현보와 연애라고 하기는 풋풋하고 첫사랑이라고만 하기에는 좀 더 쌍방향의 관계를 맺는다. 풋풋하고 잘 생긴 데다 군에 징집됐다 사지 멀쩡한 상이군인으로 돌아온 그에게서 나는 장점만을 발견한다.

철없던 사랑인지라 손위인 나는 현보를 은근히 부추기고, 현보는 저를 위해 월북하지 않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들들 볶아 돈을 마련하고는 한다. 그저 돈만 마련하는 게 아니라 막말도 서슴지 않으니 불효자도 그런 불효자가 없다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더없이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다 미군부대에 취업하게 된 나는 그곳에서 만난 은행원과 결혼을 한다. 다섯 식구의 유일한 돈줄인 딸에게 번듯한 은행원은 나무랄 데 없는 혼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현보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소설은 바삐 흘러간다. 살림살이에 재주도 의욕도 없는 며느리와 요리에 유달리 집착을 보이는 시어머니의 공존, 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숨 쉴 구멍을 찾는 남편의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절로 호기심을 자아낸다. 시간이 휙휙 지나 나는 다시 또 옛 남자 현보의 근황을 알게 되고, 그와 만나고, 상처를 입고, 다시 또 수많은 일들을 겪어 나간다.

삶의 본질을 건드리는 섬세한 문장들

낭만과 현실이 수시로 엇갈리는 가운데 변치 않는 순수를 간직한 현보가 어느 순간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게 되기까지 나는 봄 같은 소녀에서 여름 같은 처녀를 지나 깊은 가을 낙엽 떨어지는 시절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제가 자리를 마련해준 옆집 아이는 미군 병사들의 애를 여러 차례 뗀 양공주가 되어버리고, 가혹한 시선을 견디다가 마침내는 미국으로 훌쩍 떠난 뒤 또 악착같이 제 조카들을 한국인과만 결혼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머니가 되어버린다.

소설 속 집은 사대문 안 기풍 있는 기와집과 신발을 벗지 않고 부엌으로 갈 수 있는 일본식 적산가옥, 공간이 비할 바 없이 넓게 빠진 신형 양옥들로 변화한다. 재산은 막힘없이 불어나고 돈보다도 다른 무엇들이 훨씬 빨리 몸집을 불리는 풍요의 시대가 이어진다. 급변하는 시대상 가운데 사람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며 마음가짐 또한 변해간다. 보는 위치가, 관점이 달라지고 그로부터 태도며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녀의 작품이 인간과 삶의 본질을 슬며시 건든다고 이야기한다. 본질이란 시간이 지난다 해도 변치 않는 무엇이고,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이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를 특별하게 담아낸 이유일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한다 해도 결코 변치 않는 것이 몇 개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 그에 대한 답을 독자들은 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도 내 헌 빤스 입고 돌아가셨다우. 내 내복 찌들어서 버리면 멀쩡한 거 왜 버리냐고 주워다가 껴둔다고 와이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 들었어도 그 정돈 줄은 몰랐어. 와이프도 몰랐겠지. 돌아가시고 새 옷 갈아 입혀드릴 때 와이프가 그걸 보고는 내 손을 끌어다가 억지로 남자 빤스 고추 구멍을 만져보게 하는 거야. 내가 그것만은 꼭 봐둬야 한다나. 정말 내 빤스였어. 혹시 해진 데는 없나 해서 손으로 골고루 더듬어 보았어. 어머니가 장사 다닐 때 내 해진 런닝구 입고 다니던 생각이 나서. 해진 데는 없었지만 우리 엄마 너무 말랐더라.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p. 309, 310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은이), 현대문학(2021)


태그:#그 남자네 집, #박완서, #현대문학, #한국소설, #김성호의 독서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