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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있는 문묘를 다녀왔다. 문묘는 유학에서 공자를 기리는 제례 공간이다. 한편 문묘와 함께 설립되는 국자감은 학문의 공간이다. 유교를 정치 이념을 삼은 국가였던 우리나라, 중국, 베트남에는 공통적으로 수도에 문묘가 설치되었다. 하노이 문묘는 1070년 건립되었다. 고려의 문묘와 국자감은 992년에 건립되었으니,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번 여행은 하노이의 문묘를 중심으로 여정을 계획했다. 하여 숙소는 문묘와 가까이 있는 하노이역 후문에 있는 업소로 정하였다. 하노이의 고지도를 살펴보면, 예전에는 하노이역 후문 방향에 문묘 학생들의 학사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대학교의 기숙사라고 볼 수 있다.
 
하노이 문묘 정문 사진
 하노이 문묘 정문 사진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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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의 정문 옆에는 매표소가 있었다. 정문 앞을 중심으로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고,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정문 위에는 양쪽으로 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의 원은 태양을 상징하며, 중간에는 종이 있다. 오른쪽 문에는 호랑이가, 왼쪽 문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호랑이는 문묘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가는 학생들이 호랑이처럼 용맹해지라는 뜻이란다. 우리나라의 유교 건물 앞에는 주로 나무에 붉은 색칠을 덮은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베트남의 경우에는 돌로 만든 석상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이 특이했다.
  
하노이 문묘 규문각 사진
 하노이 문묘 규문각 사진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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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으로 들어가면, 양 쪽으로 연못이 있다. 정문에서 마주보이는 2층의 전각의 이름은 규문각(奎文閣)이다. 규문각은 서적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규문각은 베트남 10만동 화폐에 그려져 있다. 한편 우리나라 화폐 1000원권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성균관의 명륜당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양 옆으로 돌로 만들어진 비석들이 줄지어 있다. 이들 석비의 이름은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이다. 82개가 현재 남아 있으며, 문묘 출신의 유명한 유학자들의 명단을 돌에 새긴 비석들이다. 특히 이들 석비는 2010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다.
 
만세사표(萬世師表)
 만세사표(萬世師表)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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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비들을 지나면,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사당인 대성전이 보인다. 특히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공자의 삶과 사상을 본보기를 강조한 유학의 정신을 하나의 단어로 정리한 것 같다.

대성전 앞에는 청동으로 만든 거북이에 올라선 학의 모형이 있다. 거북이의 머리와 학의 가슴을 쓰다듬으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속설이 있다. 원래는 대성전 뒤에는 학문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국자감이 있었지만, 근대에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도 복원을 못하고 있다. 
 
하노이 문묘 호수
 하노이 문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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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를 둘러보고, 문묘의 길 건너에 있는 호수를 찾았다. 지금은 복원 공사 중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관리자가 나에게 잠시 들어와서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예전 지도를 살펴보면, 원래는 문묘와 이 호수사이에는 도로가 없고,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호수 중간에는 섬을 만들고, 다리도 놓여 있었다. 호수 안에서 배를 띄우고, 유학자들이 뱃놀이를 하면서 시를 지었다.

이번 여행에서 문묘를 방문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베트남 헌법에 적혀 있는 '인의'의 뜻을 찾고 싶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헌법 전문에는 유학의 최고 가치인 '인의'가 적혀 있다. 물론 베트남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유학 사상을 정규 학교 과정에서 공부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여전히 인(어짐)과 의(올바름)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다.

두 번째는 조선의 유학자과 교류한 베트남 유학자들의 사상도 살펴보고 싶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유학자들과 베트남 유학자들이 중국의 사교사절로 북경에서 만나면, 서로 필담으로 교류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평가받는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1563∼1628)이다.

이수광은 베트남 유학자들과 필담으로 나눈 내용을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에 남겼다. 이수광은 '베트남은 문자를 아는 국가'라는 사실을 지봉유설에 남겼다. 특히 이수광은 베트남의 역사와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공자의 언행만을 해석하는 학문을 넘어, 자신의 관점에서 익힌 지식을 학문으로 체계화하는 실학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준다.

하노이의 문묘에 있는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다. 지금쯤 우리나라의 성균관에 있는 은행나무는 은행잎들이 노란색 물이 들었다가, 떨어지는 계절이다. 귀국해서 우리나라 성균관을 찾는다면, 이수광에게 오늘날의 베트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제국의 식민지를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스스로의 힘으로 '공화국'을 건국한 공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그:#하노이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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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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