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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없이 떠돌며 외롭지 않았다면, 가족 기반이 끈끈하고 유대가 튼실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지난해 8월 26일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스위스에서 안락사(조력사)로 생을 마감한 분은 동행했던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하려는 이야기와는 거꾸로지만 '가족'이 안락사 선택의 주요 변수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같기에 이렇게 시작해 보았습니다.

고인은 '가족 기반이 헐거워서' 안락사를 택하는데 갈등이 적었다고 하신 반면,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견고한 가족 기반'이 되레 안락사를 택하게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속되게 말하자면 '가족 눈치가 보여서' 안락사로 생을 끝내야 하지 않겠냐는 응답입니다.

'조력존엄사 입법화에 찬성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
까?'(출처 : 한국리서치 정기조사 여론 속의 여론, 2022.7.1-7.4)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락사를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 겪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 그로 인한 고통(20%)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는 '극한에 처한 본인의 고통'이 안락사 결정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말이지요.

"2020년도 노인실태조사에 의하면 한국노인 90.6%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을 좋은 죽음으로 생각하고, 간병 등으로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조사에서는 잘 관찰되지 않는 소견이다. 그로 인해 간병하는 가족들 앞에서는 빨리 죽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의료진만 있게 되면 더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환자도 적지 않다." - 11월 7일자 한국일보, '의사에게 생명단축 동참하라는 법안' 내용 일부

이는 국내 호스피스 및 연명의료결정제도 도입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서울대병원 내과 허대석 교수의 현장 진단입니다. 이쯤 되면 나라에 따라 '안락사는 현대판 고려장'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2001년, '말기 환자이면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반드시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에 한해 안락사를 허용했지만 2018년에는 그 대상을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으로까지 확대했고, 2년 후인 2020년부터는 중증 치매자도 안락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증 치매 환자가 어떻게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지 의문이며, 치매 증상이 없었을 때 의사를 분명히 해두었다 해도, 치매 진단을 받고 치매가 진행되면서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거겠지요.
 
75세 이상이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정책을 홍보하고 있는 영화 속 장면
▲ 75세 이상의 안락사 선택 독려를 국가 정책으로 다룬 영화 플랜 75  75세 이상이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정책을 홍보하고 있는 영화 속 장면
ⓒ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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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인 하야카와 감독의 <플랜 75>는 정부가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면서 75세 이상 노인에게 안락사 선택을 독려하는 '플랜 75' 정책을 공공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죽음에 관여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호텔 메이드로 일하는 주인공 독거 노인(여. 78세)은 뜻하지 않은 일로 해고를 당한 후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만 쉽사리 찾아지지 않자 플랜 75를 생각하게 됩니다.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도입된 안락사가 귀찮고 쓸모없는 인간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한 술 더 떠 영화에서처럼 75세 이상이면 누구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모든 가능성이 안락사법 제정 이후 전개될 현실이라면 그럼에도 여전히 입법화를 환영할 수 있을까요?

안락사, 조력사에 관한 논의, 다음 회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태그:#스위스안락사 , #조력자살 , #존엄사, #스위스안락사현장에다녀왔습니다 , #조력존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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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생.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저서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강치의 바다』 『사임당의 비밀편지』 『내 안에 개있다』 등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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