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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4년 11월 29일 오후 부산에 발을 들였을때 나는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년 전 한미 수교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산 땅을 밟았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오늘 부산에 도착하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3년 전 요리저리 몸을 피해가며 이 곳을 돌아다녔을 때에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다시 부산을 찾게 될 줄을!" - 조지 포크의 일기


내가 부산에 들어섰을 때에 마침 장날이습니다. 사람들이 바글거렸는데 정말이지 이상한 일은 장사꾼들이 모두 여자들이라는 점이었어요. 300명 가량의 여자들이 길가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좌판을 벌여 놓고 있었지요. 왁자지껄한 장터를 지나 숙소에 도착하자 부산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찰스 그렙스Charles Krebbs가 찾아왔습니다.

고달프고 외로워 보이는 그는 나를 뜨겁게 환대했습니다. 늦은 점심으로 식사를 같이 했는데 한 달 만에 먹어보는 서양 음식이었지요. 맛은 별로였습니다. 좀 후에 독일인 랜디트Landit가 합류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세관원이었구요. 둘 다 모두 조선의 외교·세무를 틀어쥐고 있는 독일인 묄렌도르프에 의해 고용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묄렌도르프를 좋아하지 않았고 무서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 만에 보는 이 서양족들과의 만남은 즐겁다기보다는 언짢았습니다. 그들은 동료 세관원들에 대한 험당을 기름지게 늘어놓았고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부었으며 서로 시기질투가 심했습니다. 

그날 저녁 크렙스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11시경에 숙소로 돌아 왔는데 커피를 많이 마신 탓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조선 소년들의 외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와시- 고자이마스(정어리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말로 외치며 생선, 감, 곡식을 행상하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생기가 넘치는 소년들의 목소리는 생명의 신호였습니다. 일반 조선인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나는 서울의 미국 공사관에 편지를 썼고 아울러 나가사키의 여자 친구 무라세 카네에게도 썼습니다. 카네는 나중에 나의 배우자가 될 것이고 나와 함께 묻힐 것입니다. 

편지를 마치고 상념에 젖어있는 나를 깬 것은 기분 나쁜 미국인이었습니다. 피에르 주이Pierre Jouy라는 자인데 부산에 거점을 두고 조선의 도자기를 사냥하고 있었습니다. 도굴꾼들이 무덤에서 파낸 도자기를 수집하는데 열광한 그에게  한국 땅은 도자기가 묻혀 있는  묘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미국에 돌아가 말했습니다. "한국은 거대한 묘지이다Korea is one vast graveyard."

한국인 여러분, 일본인들이 옛날에 한국 도자기를 어떻게 탐냈고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아마 모를 겁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미국인 수집가들에게도 한국 도자기는 가장 매혹적인 표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옛 도자기 중에서도 고려청자가 수집가들을 가장 열광시켰습니다. 당시 고려청자는 대부분 송도(오늘날의 개성)의 무덤에서 흘러나왔지요. 물론 광택이 없는 신라시대의 도자기도 눈독의 대상이었고 조선 초기의 백자도 매혹적이었지요. 일반적으로 오래되고, 희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냥꾼들의  표적이었지요.

알려져 있디시피 한국 도자기에 먼저 눈을 뜬 외국인은 일인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다도에 심취한 엘리트들이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1876년 일본 함포의 위협하에 조선의 빗장이 열렸을 때 남모르게 눈동자를 반짝였던 일본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도자기 수집가들이었습니다.

특히 다도에 심취한 상류층은 천금을 주고라도 한국 도자기를 손에 넣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고려청자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도취되었고 그와는 다른 특징을 지닌 조선 자기의 담백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에 또한 매료되었지요. 그렇게 무형의 도자기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은밀하면서도 뜨거웠습니디.

당시 조선 땅의 도자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나와서 어떻게 여러 거간꾼과 중개상을 거쳐 유통되고 매매되었는지 그 자세한 과정에 대한 기록은 아마 없겠지만, 그 대강을 재구성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어떤 자기들은 전문적인 조선인이나 일본인 도굴꾼이 한적한 무덤에서 훔쳐낸 것이고 또 다른 자기들은 사가에서 팔아넘겼거나 절도당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오게된 자기는 수집가에게 직거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거간꾼의 손을 거쳐 거래되었습니다. 

1880년대 조선 땅에서 미국인 수집가들을 손꼽으라 한다면 루이, 버나두해군 소위, 알렌 의료선교사 A 등이었습니다. 나 또한 조선 문물에 대한 강렬한 관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나의 주된 관심 품목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고지도였습니다. 그때 내가 수집한 고지도들이 지금 미국에 전해 올 겁니다. 헌데, 미국인 수집가 중에서 유난히 도자기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페이르 주이Pierre Louis Jouy였지요.

주이는 괴거 한 때 미 해군에 수집·채취 전문요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즉 1881년과 1882년 두 해에 걸쳐 필로스Palos호에 배속되어 동북아시아 연해의 어류 및 조류를 수집하였지요. 임무가 끝나자 1882년 6월 그는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귀임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못 말리는 사나이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싫었고 해군도 싫어졌습니다. 해군 요원 자격으로 그동안 수집 활동을 벌이면서 그는 해군의 규율을 받아야 했는데 그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규율과 제약을 받지 않고 자연물과 문물을 사냥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 머물고 있었는데 해군 당국에 사표를 냈습니다. 자유인의 신분으로 현지에 남아 이국의 문물 수집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83년 5월 요코하마에서 조선에 초대 공사로 부임하러 가는 푸트공사를 만난 것입니다. 주이는 "특별주재관"special attaché" 자격으로 푸트공사를 수행하여 서울로 갔습니다. 여행 경비는 자신이 부담하였지요. 서울에 도착한 후 주이는 주변 지역과 제물포를 대상으로 수집 활동을 벌였지요. 그러다가 1883년 11월 육로로 부산으로 여행갈 수 있는 허가증을 얻었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부산에 본거지를 둔 채 경상도 지역을 대상으로 수집 활동을 벌이게 되었지요. 1886년 7월 조선을 떠날 때까지 그는 두 해 반 동안을 부산에서 도자기 사냥에 탐닉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부산에서 만났던 것은 그가 부산에 온 지 1년 가까이 되었던 때로서 한참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던 시기였지요.

그는 진귀한 도자기를 많이 수집해 놓았던 모양입니다. 그걸 내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자기 집에 가자고 내 손을 끌었지만 나는 뿌리쳤습니다. 그는 처음 만나자마자 매우 무례했고 공격적이었습니다. 마치 정글의 포식자나 사냥꾼 같은 인상을 주었지요. 그는 심지어 세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욕을 했습니다.

이 불한당과 내가 같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나는 너무 부끄럽기까지 했답니다.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나는 일기에 그를 "쓰레기 scrub"라고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가 수집하여 미국으로 가져간 많은 도자기는 우리 미국인들로 하여금 조선의 문화에 새로운 눈을 뜨도록 만들었지요.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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