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오랫동안 세계 질서를 이끌어가는 초강대국이자,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대표주자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냉전 시대 이후 30여 년간 유지되어 온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자국 내 경제위기와 극단적 정치 분열 속에 국제 사회에서의 리더십마저 위협받고 있는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각자도생의 시대 속에서 달라진 세계 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1일 방송된 KBS 1TV <다큐 인사이트>에서는 2부작으로 편성된 '고장난 세계' 시리즈의 1부 '떠나간 리더' 편을 통하여 급격한 혼돈 속에 국내외적 리더십 위기를 겪는 미국의 현 주소를 조명했다.

지난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승리하며 민주당이 4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또다른 갈등의 시작이었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결과에 불복했고 그 여파로 2021년 1월 6일에는 초유의 미국 의회폭동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리더를 자부하던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또한 2021년 8월 31일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면 철수하고 탈레반 정권이 부활한다. 미국이 9.11테러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지 약 20년 만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베트남 전쟁에 이어 또 한번 실패한 전쟁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2022년 기준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9.1% 상승하며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재의 달러강세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느긋한 표정으로 "걱정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이 걱정될 뿐"이라고 무심하게 답했다지만, 미국 국민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상황이 '미국과 서방세계가 그들이 만든 세계를 부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질서가 미국의 주도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현재의 시대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는 용어가 '각자도생'이다.
 
2022년 11월 열린 미국 중간선거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당초 공화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20년 만에 최고의 성적표를 받았다. 바이든 정권은 "전 세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온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중간선거 결과를 자평했다.
 
그런데 이번 중간선거가 이전과 도드라지게 달랐던 부분은 각 지역을 대표 이슈는 묻혀버리고, 현직 대통령(바이든)과 전직(트럼프)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2020년 대선의 연장선이자, 민주-공화 양당 정치의 서바이벌 권력게임이 된 셈이다. 실제로 중간선거 결과가 나온 후 11월 15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차기 대선이 아직 2년이나 남은 시점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미국은 현재 진영의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J.D 밴스는 이른바 가난한 백인 노동자 가정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 <힐빌리의 노래>로 유명해진 작가 출신 정치인이다. 벤스는 중간 선거 공화당 경선에 출마하여 당초 패색이 짙었던 밴스는 트럼프의 지원유세를 등에 업은 뒤 갑자기 지지율이 급상승했고, 오하이오 상원의원까지 당선됐다. 밴스처럼 이번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의 지지를 받거나 그와 비슷한 정치적 입장을 공유한 공화당 정치인들은 소위 '트럼프 키즈'로 불린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지지를 선언한 후보들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가 지지한 하원의원 후보들의 경선승률은 무려 97%, 상원은 100%, 주지사는 84%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트럼프의 당 내 영향력이 아직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트럼프 키즈들은 지지층을 표심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선과 중간선거에 대한 부정선거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거나, 미국 우선주의 등 트럼프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는 그 지지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현재 미국 내 선거부정론자의 비율은 무려 29%, 공화당원중에서는 무려 61%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데이비드 그린버그 럿거스대 역사학 교수는 "지난 대선 때 우리는 팬데믹을 겪었다. 선거부정론자들은 선거수행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데 불안감을 느낀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편견과 결합되어 바이든의 승리에 의구심을 느끼게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신드롬과 그 지지층의 실체는 무엇일까.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확산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경제불평등의 희생자들,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생긴 국가 정체성의 문제 등은, 그동안 미국의 주류 세력을 자부하던 백인들과 노동자 계층에게는 '이 나라가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니구나'라는 불안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다는 것.
 
사실 선거 부정에 대한 음모론은 어느 민주주의 국가나 발생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일부 유권자들의 불만과 편견을 현재 영향력있는 미국 정치인과 주요 언론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확산하고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공화당 소속의 캐리 레이크 미국 애리조나 주지사 후보, 케이 아이비 앨라배마 주지사 당선자, 마이크 콜린스 조지아 하원의원 당선자 등, 책임의식을 느껴야할 유력 정치인들은, 중간선거 기간에도 연일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며 유권자들을 선동하고 자극하기 일수였다.
 
한편으로는 이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 양극화된 분열된 미국의 정치지형이 만든 예고된 위기였는지도 모른다. 미국 사회에서는 그동안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암묵의 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상호 관용'과 '절제'다.

민주 정치에서는 여야가 있고 민주와 공화당이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다면 상대방 세력도 언제든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가 상호관용이다. 여기에서 이어지는 절제란 한 집단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100% 남용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미국 정치가 무너진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상대방 진영을 인정하지 않고 타도하고 제거해야할 '절멸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었다는 것.
 
극단적인 정치분열은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존중받아야할 기본 원리인 선거 제도마저 뒤흔들고 있다. 미국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은 현재 시스템상 투표가 조작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부정선거론자들의 음모론을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한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 중간선거에서도 패한 트럼프와 공화당 지지자들은 또다시 부정선거론을 들먹이며 곳곳에서 시위에 나섰다.
 
빌 게이츠 마리코파 카운티 선거감독위원장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사람들이 우려스럽다. 대선 이후 2년간 부정선거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들은 이미 선거에서 지면 부정선거나 사기라고 치부할 여지가 생긴 것"이라며 우려했다.

또한 게이츠 위원장은 "모든 사안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종착점이다. 그때는 결과가 어떻든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그것이 1700년대부터 이어진 미국 민주주의 공화국의 전통이었다. 그 전통이 2020년 대선과 의회폭동으로 벌어진 일들과 함께 끊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내부 위기는 경제와 글로벌 리더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속적인 물가상승과 경제난 악화로 미국에는 이른바 '바이든플레이션'이라고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여론이 악화되고 지지율이 답보상태에 빠진 바이든 정권은 물가안정을 위하여 기름값을 낮추는게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중간선거를 4개월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은 유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통적 우방국이던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그런데 바이든의 사우디행은 또다른 논란에 휩싸였다. 사우디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암살 사건 때문이었다. 카슈끄지는 미국 언론에 사우디 왕실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의문의 살해를 당했고, 무하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배후로 지목됐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한 바이든은, 대통령 후보 시절 카슈끄지 사건과 빈 살만을 직접 언급하며 "그들(사우디 왕실)이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 것이며 국제사회로부터 버림받는 왕따로 만들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바 있다. 이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사우디와의 협력을 강조한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대조됐다.
 
미국은 이른바 셰일 혁명으로 1990년대 이후 자국내 원유 생산량이 급증하며 과거와 달리 중동에 대한 석유 의존도에서 벗어났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중국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하면서, 바이든 이전의 민주당 정권이었던 오바마 행정부는, 중동의 외교적 비중을 낮추고 아시아에서 중국 견제에 더 집중하겠다는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표방하기도 했다.

이는 그동안 석유와 안보를 맞바꾸는 방식으로 유지되어왔던 사우디와 미국의 공생관계를 흔드는 조치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하기 전부터 사우디 없이도 문제없다는 노선을 취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바이든 정권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미국 기름값은 50%가 넘게 폭등했다. 다급해진 바이든은 결국 자존심을 꺾고 사우디에 손을 내밀어야했다. 바이든과 빈 살만의 어색한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언론은 카슈끄지 사건과 바이든의 과거 '사우디 왕따' 발언이 소환하며 여전히 유효한지를 질문했다. 바이든은 난감한 표정으로 침묵했고 빈 살만은 냉소했다.
 
바이든은 사우디에 원유 증산 협조를 요청했지만, 정작 빈 살만은 바이든의 면전 앞에서 '불가' 입장을 밝혔다. 대놓고 굴욕을 당한 바이든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서 명분도 실리도 잃었다는 여론의 십자포화에 시달려야했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아이덴티티(정체성)로 내세웠던 바이든과 민주당이 현실 정치의 벽에 맞딱뜨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카슈끄지와 사우디 원유 사건이었다. 국내 정치(선거와 지지율)가 대외 정치까지 움직이게 되는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처럼 세계질서는 더 이상 미국의 의지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철군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 정권이 자유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평화시위를 총으로 위협하여 제압하고, 미군 철수 1주년을 기념하는 반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굴욕적인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무능력하고 한심한 모습은, 종전과 철군을 주장해오던 미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 1월 취임식에서 미국이 다시 돌아왔다(America is back)"고 선언했지만 어쩌면 그가 자신했던 미국은 어제와는 다른 미국이었던 것은 아닐까.
 
현재의 미국은 국력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의 탄력성, 미국 특유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훼손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바이든 정권이 놓여있는 정치 질서가 전통적 미국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혼돈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이러한 시대 정신에 대한 안이하고 낙관주의적인 접근이 바이든 정권의 한계였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대중국 문제나 아프가니스탄 철수 과정에서 많은 모순과 취약점을 드러냈다. 세계적 리더십이 흔들리게 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결국 자기 것을 먼저 챙기는 미국 우선주의로의 회귀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례로 바이든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반도체 과학법 등에 잇달아 서명했다. 자국에서 제조된 차나 공장설립 기업에게만 세금감면 혜택을 준다는 내용으로, 준다는 내용으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기업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피해를 주는 법안이다. 최근 들어 '메이드 인 아메리카', '미국이 제조업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등 바이든의 경제 행보에서, 묘하게 정적인 트럼프의 그림자가 겹쳐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국내 정책과 대외정책을 양립할 수 없는 국면에 놓였다고 분석한다. 2차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에서는 미국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세계를 주도하면서 얻을 수 있는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공공재를 제공했다면, 지금은 미국이 다급한 상황이 되어 다른 사정을 챙길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탈냉전 시대를 규정짓는 질서는 미국이 주도한 서구식 민주주의, 자유무역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강력한 패권이 장기간 유지되면서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냉전시대 이후 새롭게 강력한 도전자로 급부상했고 세계질서가 지역과 자국 중심으로 다변화되고 있는 추세다. 미국은 다시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시기가 지속될 것이냐의 중요한 고비에 직면해있고, 그 여파는 앞으로의 세계와 우리나라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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