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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교실은 작은 사회와도 같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처럼 교실 속 세계에서도 학생들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이 존재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참 슬프게도 요즘 어린이들의 세계를 살펴보면,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교실에서 학생 간에 서열을 매기고 텃세를 부리고 누군가를 따돌리는 일을 보고 있자면, 어린 시절의 상처가 되살아나기도 하고, 소외된 학생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가슴 한쪽이 아파져 오는 것을 느낍니다.

심리학 용어로 '고양이 걷어차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자신보다 약한 사람한테 화풀이 하고 그 화풀이를 당한 사람은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그렇게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분노를 쏟아내다 맨 마지막에 고양이가 발로 걷어차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장 약한 자가 희생양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간간이 뉴스에서 보이는 길고양이나 강아지 학대 뉴스를 보면, 분노가 치밀기도 하지만, 한편 그 학대범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어쩌면 그 학대범도 누군가에게 지독히 학대당해 왔을지 모를 일입니다. 결과만 보면 나쁜 사람임에 틀림 없지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원인을 잘 찾아내야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고 신영복 작가님의 잠언집 <처음처럼>에는 '시대마다 그 시대의 문맥을 고쳐나가야 한다'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의 문맥은 아무 죄 없는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한 마녀사냥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문맥은 집단 따돌림과 약자를 향한 폭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왕따는 희생양 한 명을 만들어 집단의 나머지 구성원들이 결속력을 다지는 행위입니다. 왕따의 피해자가 된 희생양은 심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종종 뉴스를 장식하곤 하지요.

우리는 이제 새로운 관계 맺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소위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면서 친해진다고 하죠?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지면 당하는 사람의 인격은 난도질당합니다. 그게 사실인가 여부는 상관없이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진실성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언제든지 수틀리면 나 또한 그 험담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깐요.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 지수가 높은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겁먹은 동물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배신하거나 공격하고 나의 안정을 추구하기보다 내가 더 큰 사람이 되는 건 떨까요? 그런 것마저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요. 니체는 '사람은 탁한 강물이다. 이 탁한 물을 스스로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자신이 바다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단점이나 결점이 있지요. 누군가에게 완벽을 기대하기보다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 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관용과 아량을 베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선한 마음을 보였더니 누군가는 또 나를 배신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럴 때 분명히 어딘가에선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나처럼 항상 선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돕고 배려하고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다가와 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결국 탁한 사회를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데 일조하게 되는 거예요. 참 기쁘지 않나요? 행복하지 않나요? 너무 이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의 자정작용이 결국 물을 깨끗하게 순환시키듯이 사람과의 관계에도 자정작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촛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면, 마음을 닫고 경계하던 사람들도 그 품 안으로 들어올 거예요.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찬 세상을 보여주면 됩니다. 노력하면 됩니다. 고인 물보다 흐르는 물의 자정작용이 더 강하듯이요.

저 또한 직장에서 심한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때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도 많고 그 과정에서 세상을 저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여러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죽음 직전의 시련과 고통을 견뎌왔다는 것이에요.

한 예로 <죄와 벌>을 쓴 러시아의 대문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수로서 집행 바로 직전에 풀려나기도 했고요. 그때의 생생한 체험을 소설에 녹여냈다고 합니다. 제가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모든 시련과 고통은 그만큼 값진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앞서 언급한 니체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두려움에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따돌리기보다 그 사람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거예요.

설사 그 사람마저 나를 배신하더라도 나는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힘이 있어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요.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의사예요. 그때의 경험을 <죽음의 수용소>라는 저서로 남기고 의미치료를 창시했죠.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는 밤, 길가에서 새끼 고양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에 다가갔지만, 곧 어미 고양이가 다가와서 그르렁거리며 무섭게 노려보더라고요. 길고양이들은 대부분 사람을 너무나 경계하더군요. 두려움이 그런 경계하는 태세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미노처럼 대물림되는 폭력에서 누군가는 끊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나보다 약한 고양이를 보호하는 자, 지켜내는 자,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지켜주었으면 좋겠어요. 한 명도 소외되는 이 없이 아끼고 존중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태그:#왕따, #따돌림, #집단따돌림, #사랑,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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