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혜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어떤 이유>(애지, 2022)
 박혜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어떤 이유>(애지, 2022)
ⓒ 안준철

관련사진보기


박혜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어떤 이유>(애지, 2022)에는 섬 이름이 많이 나온다. 이름도 재밌다. 적금도 조발도 둔병도 등. 박 시인은 "구비쳐 온 길들이/바다와 마주치고/바다는 또다시/수평선 밀어내며 먼 길 떠나고/보이는 곳마다 계단을 만드는(여수麗水)"아름다운 물의 도시 여수에서 산다. "구비쳐 온 길이 힘든 당신,/(...)/여수로 오시라"고 시인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참에 나는/연못 한가운데 방을 하나 잡고/한 계절을 들어가 살아야겠습니다/명주 실타래가 다 들어가도 끝이 없다는/그 곳으로 들어가/어머니 자궁에서 그랬던 것처럼/내 손가락을 빨며/세상에 나가 어떤 별로 뜰까만 생각하겠습니다
-<둔병도> 부분


둔병도에 가보았다. 아니,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열흘 전쯤, 모 시인이랑 여수에 갔고, 거기서 또 모모 시인을 만나 어딘가를 향해 가다가 '둔병도'라고 적힌 이정표를 본 것이 전부니까. 둔병도는 둠벙(웅덩이)이 두 개가 있고 둠벙 같은 해안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박 시인에게 둔병도는 어떤 곳일까? "어머니 자궁에서 그랬던 것처럼/내 손가락을 빨며"라는 시구만 읽어도 대강 알 것 같다. 거기에 "세상에 나가 어떤 별로 뜰까만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한 걸 보면 둔병도가 박 시인에게는 어떤 시원이나 순결한 원형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초록별에 오염된 기침을 쏟아내고 있다"는 걸로 보아 현실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보인다. 시인의 현실이든 시인이 사는 사회의 현실이든. 그럼에도 시인은 "나, 잠시 명주실 한 끝을 잡고 초록 꿈을 꾸는/연못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고 있다.

박혜연 시인에게 시란 

이쯤에서 털어놓자면, 나는 시인으로서 욕심이 없는 편이다. 결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시가 나에게 오면 온 만큼만 적는다. 그것도 힘에 부치니 욕심을 안 부렸다고 할 수도 없겠다. 그런데 조금 더 욕심을 부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명주실 한 끝을 잡고 시의 연못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었다. 박 시인의 시편들을 정독한 뒤의 일이다.

물론 시 창작에서도 욕심은 금물이다. 시를 쓰는데 있어서도 욕심의 적정선이 있을 법하다. 그것은 제시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박혜연 시인 만큼이면 딱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절차탁마의 과정을 착실히 밟되, 지나칠 정도로 언어표현에만 매몰되지는 않는. 가령, 이런 시는 어떤가?

당신의 집이 좋아/창문 하나 없는 벽에 귀를 기울이면/이야기 소리 들려오는//울타리도 없고/대문도 없고/커다란 지붕만 하나 얹은 당신의 집/오랜 세월 고요한 이끼에 싸인/당신의 집에 기대면//청동 거울에 비친 하늘이 쨍하고 반짝이는 소리/민무늬항아리에 차르륵 곡식낟알 쏟아지는 소리/돌화살촉이 들판을 가로 지르며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
-<고인돌> 부분


박혜연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박 시인은 순천작가회의가 주관한 문학아카데미 수강생 중 한 명이었다. 시가 참 좋았다. 그때부터 이미 시인이었다. '아, 시라는 것이 없었다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이번 시집 맨 마지막에 실린 시다. 박 시인에게 맨 처음 시가 찾아온 순간의 경이를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던 그 눈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검고 푸르스름한 빛들이 겹겹이 층을 이룬 눈/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그날 이후/나는 마당 한 켠에 앉아 있는 날 많아졌습니다/문장들이 작은 마당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詩> 부분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던 그 눈"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눈이겠다. "그 눈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순간이야말로 시가 탄생하고, 나아가 시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날 이후"가 얼마나 축복의 날들이었을 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문장들이 작은 마당에서 시작되고 있었"다니!

시인의 눈 

신병은(시인·문학평론가)은 시집 해설에서 "나를 지켜보는 검고 푸르스름한 빛의 눈은 내 안에 있는 심안에 다름 아니다. 박혜연의 별은 시인이 만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이며 깊고 깊은 말들이 넘실대는 별 너머의 별, 현재의 나를 넘어 저쪽에 있는 나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는 별처럼 마냥 반짝반짝 빛나는 시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래의 꿈>에서는 "바다에 태어난 자의 운명//휘몰아쳐오는 파도, 시퍼런 작살을 쉼 없이 받아야 했어//부서지는 게 바다인지 바다 위의 파도인지//파도 속의 나인지"라고 가파른 현실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끝내는 "작디작은 알갱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단단한 바닥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나는 깨지지 않는 바닥이야"라는 마지막 시구가 주는 울림이 큰 것은 시집 전반에 흐르는 만만치 않는 삶의 파랑으로 인함이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 덜컥,/내려앉는 날이면/불쑥 어머니의 부엌이 떠오르기도 하고(낭도에서 불을 지피다), "갓 김치를 입에 넣으면//혼자서 나를 키운 어머니 등이 너무 쓸쓸해//주저앉았던 어느 날처럼//숙성된 고통의 비밀을 단번에 알아버린 것 같아//입 안에 매운 눈물이 고이(매운, 기억)"기도 한다.

<오동도-동백아가씨의 꿈>에서는 박 시인의 어머니가 지아비, 혹은 가장의 부재로 인해 한 때 "파도에 몸을 던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목도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친 풍랑마저 바닥을 미는 힘으로 바꾸었던 여자"로 거듭나게 되고, 끝내는 "추운 겨울날 빨간 꽃을 밀어 올리는 동백처럼/운명을 이겨낸 자의 붉은 노랫소리"가 되어 "핏빛 열애의 숲, 오동도를 흔들고 있다"라는 시적 표현의 주인공이 된다.

박 시인은 여수에 사는 시인답게 '갈치', '작심 게장', '장어탕 이야기' 등등의 바다 음식과 관련한 맛깔스런 시도 많이 선보인다. 박 시인은 어느 날 몇이서 게장 백반을 먹으러 간다. 가는 길에 '작심 독서실' 간판을 보면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유효시간이 삼일일까" 생각한다.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야 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백전백패 단 한 번도 승리도 없을 것이다"라고 약한 생각도 한다. 하지만 반전의 순간이 이렇게 온다.

물렁해지지 않으면 스며들지 못하는 세상, 물컹물컹/건너다보니 한 세월이 다 건너간다//제 살과 껍질을 내려놓은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저녁, 물러지지 않고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그렇게 한 세상 저물어도 좋겠다
-<작심 게장> 부분


"물러지지 않고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단단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이미 단단해진 것이 아닐까. 너와 나, 그 관계의 삶 속에서는 말이다.

끝으로,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 <어떤 이유>를 소개할 차례다. 박 시인은 "내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지병이 있다면/잠에서 깨는 순간 낯선 행성에 홀로 서 있는 것이다"라고 토로한다. 그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서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절박하게 지구의 창을 두드리며/발랄했던 아침 창가 새라든지/밑줄 그으며 읽던 책이라든지/아가하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등을 불러들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시구들이 처연하면서도 뜨겁다.

나는 여수에 자주 가는 편이다. 바다가 좋고 여수 오동도 붉은 동백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구비쳐온 길이 힘들었던, 삶의 시퍼런 파랑에서 건져 올린 짭조름한 향이 나는 맛깔스런 시를 쓰는 여수 시인들과의 교류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박혜연 시인은 1993년 <시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붉은 활주로>를 냈다. 2017년 한려 문학상, 2018년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으며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코로나19 예술로 기록' 사업으로 <상실의 시대> 공저 시집을 펴냈다. 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상재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어떤 이유

박혜연 (지은이), 애지(2022)


태그:#박혜연 시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