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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출판 기획자로 일하다 그림책 이론을 공부하는 자발적 시민 모임을 열었습니다. 평범한 경력 단절 여성의 시민 모임 운영, 그 소소한 도전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다른 독서 모임과 비교할 때, 우리 모임은 좀 특별하다. 다른 모임 이야기를 들어보면 독서보다는 사는 이야기나 잡담을 하다 집에 가는 날이 더 많다는데, 우리 모임은 어찌나 정직한지 딱 두 시간을 꽉 채워 정말 공부만 하다 간다. 가끔 모임이 끝나고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점심을 먹으면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일상적이진 않다. 

이론서를 읽고 관련된 그림책을 보다 보면 2시간이 금방이다. 시간을 체크해가며 서둘러야 겨우 끝나는 시간을 맞출 때도 많다. 좋게 말하면 배우는 게 많고, 나쁘게 말하면 빡센(?) 모임. 

그래서 그런지 인원을 모집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단순히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모임이 아닌 공부하는 모임이라 부담스러운 걸까. 인원 모집글을 올리면 순식간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는데, '이런 이런 모임입니다' 이야기하고 나면 그다음엔 연락이 없다. 

각오(?)를 하고 모인 사람들도 가끔 볼멘소리를 한다. "이번 책은 너무 어려운데 다음에는 좀 쉬운 거 해요." '쉬운 책은 집에서 혼자 읽어도 되는데... 어려워서 스터디를 하는 건데...'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너무 내 편에서 바라보는 걸까 고민이 깊다.

책이 어려워서 읽다 포기하고, 책을 못 읽었으니 빠지게 되고...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처음 이탈하는 인원이 생길 때는 두 세명이 모여서 하는 모임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되도록이면 과반수 이상의 인원이 모였을 때 모임을 하고 싶었다. 대학 교재 같은 이론서의 난이도를 고려할 때, 한 두 번 빠지다 보면 따라오기 벅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임에 흥미를 잃게 되고 프로 불참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다. 두 명만(나 포함 한 명 더) 모이면 무조건 진행하는 게 '꾸준히'라는 측면에서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성실한 참여자에 대한 예의이고, 이 모임을 지속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랬더니 아뿔싸! 프로 불참러가 대거 속출한다. 두 명 모이기도 힘들어질 거란 위기감이 든다. 

모임을 시작하며 했던 고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모임을 시작할 때 고민했다. 이들과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나눌 수 있을까, 나누어야 할까. 공부하는 모임이지만 분명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삶을 나누게 될 텐데... 자연스럽게 어떤 모임에서 만나, 한때는 친하게 지냈지만 이제는 연락조차 하지 않는, 스쳐 지나갔던 관계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연락을 하며 친밀함을 유지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10년 이상을 알고 만나온 사람들이다. 유치원 때부터 알아서 가족 같은 친구, 중고등학교 때 만나 매일같이 단톡방을 울려대는 녀석들처럼 말이다. 특별히 더 신경을 쓰거나 관심을 갖지 않아도 이미 신뢰가 쌓인 관계들, 내 삶을 헤치거나 변화시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얼핏 '인싸'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아싸' 기질인 나는 관계가 부담스럽다. 불특정 다수 앞에서 강연을 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비교적 쉽다. 좀 진이 빠지겠지만 몇 시간이고 만나 떠들어댈 수 있다. 그런데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건 다른 문제다. 

특히나 외지에 나와 친구를 사귀는 일이란 여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 아니다. '오지라퍼'라서 한번 마음이 쓰이면,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일상을 망쳐버릴 때도 많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 그래서 결혼 후 4년 동안 친구 하나 없이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쯤 되면 다들 그런 건지 얼마 전 한 친구도 도서관 모임에서 갑자기 사람들과 친해져 부담스럽다고 했다. 당장 말이 잘 통해서 가까워졌는데 나중에 혹시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란 걱정에 경계하고 벽을 쌓게 된다고.

모임 시간에 빡빡하게 이론서를 나누기만 했던 나는 어쩌면 공부하는데서 그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는 것보다 더 피곤한 것이 관계라는, 누적된 체험이 본능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미술관에 다녀왔다. 그림책 모임의 참여자 중 한 명이 개인전을 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그녀는 처음 모임을 열 때 가장 먼저 내게 연락을 해 온 이다. 

가치관이나 교육관이 비슷해 이야기가 잘 통하는 동갑내기. 학교 일과 개인전 준비로 바빠 모임에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같이 하자고 해놓고 계속 빠져서 정말 미안해요." 불참을 알릴 때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마음이 항상 고마웠다.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꼭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즐거웠다. 
   
지난 11월에 열린 개인전, 벌써 10번째라고 한다.
▲ 그림책 모임 참여자의 개인전 지난 11월에 열린 개인전, 벌써 10번째라고 한다.
ⓒ 김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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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딴짓을 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공부는 잠시 접어두고 조촐한 송년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아이 어린이집에 보낼 생일선물 포장조차 귀찮아하는 슈퍼 귀차니스트로서 큰 결심을 했다.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다. 한 해의 마지막 모임에 일 년을 돌아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예전에 읽었지만 언제 읽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책들이 있다. 언젠가 그런 책들의 쓸모에 대해 따져 본 적이 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떠나 지금의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책들. 어떤 의미가 있을까 떠올려보다 문득 없어진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고 때때로 멈춰 생각하며 나의 세계를 확장해 간 그 찰나는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고. 그런 순간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는데 보탬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잊히고 스쳐 지나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짧은 만남의 순간에 그들과 나눈 교감으로 나는 조금 더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최소한 그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니, 설령 나를 망가뜨렸던 관계라 할지라도 돌아보면 배우는 게 있었다.

점점 쇠퇴해가는 모임의 부흥과 융성을 위해 일부러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언제까지 모임을 이어갈지 모르지만(사실 망하기 직전이다) 그저 지금 내가 마주한 이들과 삶을 나누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다. 

마르틴 부버가 그의 책 <나와 너>에서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만남으로, 더불어 함께 가는 이야기가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그림책, #모임,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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