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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의 반격 책 표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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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서울에서 혼자 사는 서른 살 여자다. 고향의 부모에겐 알리지 않고 월세가 싼 반지하방으로 집을 옮겼다. 열 달 째 대기업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인턴으로 출근한다. 만료를 앞두고 계약이 연장되긴 했지만 정직원 전환은 기약이 없다. 박봉이지만 요즘 같은 취업난엔 갈 곳이 마땅찮다.

<서른의 반격>은 막 서른이 된 지혜의 삶을 다뤘다. 답답하고 부당한 일이 있어도 어디 하소연할 곳 없던 지혜의 일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포착했다.

변화엔 언제나 계기가 있다. 따분하고 지루하며 가끔은 막막하던 지혜의 삶에 한 남자가 들어오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같은 회사 인턴으로 새로 채용된 동갑내기 규옥이 바로 그다.

규옥은 여러모로 눈길이 가는 사내다. 수더분하고 선한 인상이지만 어딘지 강단이 있어 뵌다. 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음에도 의뭉하다는 인상은 없다. 자연스레 사람들과 친해지는 법을 안다.

새 사람이 가져온 새로운 바람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규옥의 진가가 드러난다. 아카데미 수강생 둘과 규옥, 지혜가 모인 자리에서 일당이 결성된다. 사무실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하는 김 부장에게 창피를 주자는 것이다. 장난처럼 계획된 반격은 다음날 바로 시작된다. 김 부장 책상 위에 '아무 데서나 방귀뀌고 트림하지 말라'는 쪽지가 올려졌고, 김 부장의 태도는 완전히 바뀐다.

다음엔 좀 더 통쾌한 사건이 기다린다. 떡볶이 비법소스를 오래 연구했다가 특허를 동업자에게 빼앗겼다는 수강생을 위해 일당은 복수를 기획한다. 상대는 사업이 성공하고 유명세를 얻은 뒤 국회의원까지 된 인물이다. 일당은 그가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계란을 던지는 테러를 기획하고 수행한다.

일당의 반격은 계속된다. 다음엔 다른 수강생을 위해서다. 그는 시나리오 공모에 참여했다 탈락했는데, 그 시나리오가 대기업이 투자한 영화에 약간의 각색을 거쳐 나온 것이다. 영화를 홍보하는 날, 미리 준비한 플랜카드를 관객과 기자들 앞에 내걸겠다는 게 이들의 야심찬 계획이다.

세상에 던지고픈 발칙한 반격

<서른의 반격>은 말 그대로 서른 살 지혜와 규옥이 오만하고 야비하며 거짓된 세상에 던지는 반격을 다룬다. 부당한 상황도 '으레 그런 것'이라며 참고 넘기던 지혜가 '그건 틀렸다'고 발칙한 반격을 꾀하는 과정이 상당히 통쾌하다. 그 과정들은 온갖 부조리에도 어쩔 수 없다며 모른 척 지나가는 게 결코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걸 일깨운다.

규옥이 주도한 반격들은 하나하나 놀랍고 통쾌하다. 우리네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반격이라서 더욱 그렇다. 소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 사는 세상에도 이런 통쾌한 반격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뉴스에서, 입에서 입으로, 때로는 직접 겪기도 하는 부조리한 상황들이 있다. 내정자가 정해진 입학과 입사, 약자에게 갑질하는 강자들, 사기를 쳐서 돈을 버는 부자들 같은 것들이다. 그런 상황 앞에서 '이건 잘못됐어' 하고 외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 일이 아니라서, 무서워서, 귀찮아서, 눈 질끈 감고 넘어간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떠올린다. 별일 아닌 척 참고 지나가다보면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날도 온다. 그러다보면 어쩌다 누군가 문제를 삼더라도 문제 삼는 사람이 마뜩찮게 여겨지곤 하는 것이다.

이 시대 독자들이 공감할 이야기

소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하나 같이 누구나 한 번 쯤 살면서 마주할 수 있는 사건들이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들은 제 삶에서 겪었을 부당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어느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한 일이 있다. 열 명 가량의 인턴 중 세 명은 정규직 전환을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모두가 정규직 전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어서, 몇 개월이 지나자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드러났다. 인턴들 사이에서도 누구누구가 전환되지 않겠느냐는 평가가 돌기 시작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전환 결정이 나기 불과 몇 주 전이었다. 자주 지각을 하고 업무 평가도 좋지 않았던 인턴 하나와 관련한 소문이 부서에 돌기 시작했다. 그 인턴이 회사 임원의 딸이라는 내용이었다. 어느 인턴이 회식자리에서 임원 중 누군가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다. 소문이 돈 뒤 인턴 중 하나가 직접 그 인턴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한 방 먹이고 싶다면

그로부터 몇 주 뒤 그 인턴은 정식으로 입사했다. 합격한 다른 인턴들보다도 좋은 부서로 배정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떨어진 인턴들끼리의 술자리가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그 인턴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떤 잣대로 판단한대도 술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인턴보다는 강점이 많은 터였다. 하나같이 울분 어린 목소리로 그 인턴을 비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술자리를 벗어나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현실은 암담하지만 가능성 있는 이십대 청춘들이었다. 언론에 제보하거나 온라인에 폭로했다가 색출당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모두에게 있었다. 간간이 만나 그때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떠올리고 성토하는 정도가 합리적 선택이라고 믿었다.

비슷한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채용비리는 흔한 편이었다. 어느 언론사 사장 딸이 아버지 회사에 입사했다는 뉴스 댓글란엔 학교와 병원, 공공기관, 사기업을 가리지 않고 부정채용을 본 적이 있다는 폭로가 잇따랐다. 개중 몇쯤은, 어쩌면 대부분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당당히 반격의 주먹을 뻗자

고백하자면 살면서 이외에도 많은 부조리를 눈앞에서 본 일이 있다. 서른을 훌쩍 넘도록 나는 그 부조리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다. 몇은 모른 척 넘어가고, 몇은 알면서도 꾹꾹 참아내고, 또 몇은 싫은 기색을 비추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규옥을 경험한 지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거짓으로 진실을 훼손하고, 부조리로 정의를 더럽히는 못된 것들에 당당히 반격의 주먹을 뻗을 것이다.

<서른의 반격>을 읽으며 일상의 부조리를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규옥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지혜처럼 조금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서른을 훌쩍 넘은 지금, 조금 늦었지만 반격을 준비하기로 마음먹는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은이), 은행나무(2017)


태그:#서른의 반격, #손원평, #은행나무, #한국소설,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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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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