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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유행한 지 이제 거의 꽉 찬 3년째. 그동안 우리 가족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 '우린 슈퍼 항체 보유자인가 봐', 하고 조금 자만했다. 그러나 이번 겨울, 다시 코로나가 유행할 거라는 뉴스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딸이 코로나에 걸렸다.

아이는 확진 판정을 받기 전에 이미 많이 아파 그런지 확진된 후에는 오히려 상태가 괜찮았다. 격리된 안방에서 유튜브를 보며 하하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왠지 얄밉다. 난 아이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너 괜찮은 것 같으니 내일은 식사 넣어줄 때 문제집도 같이 넣어주겠어!"

괜한 말을 했는지 그날 밤 아이는 열이 났다. 난 내 입방정을 탓하며 '그래, 일주일은 네 맘대로 해라' 하고 마음을 비웠다. 그 다음 날, 나도 코로나에 걸렸다. 근육통이 심해 힘들었는데 약을 먹으니 한결 나아 아이가 즐기고 있는 유튜브와 TV 세상으로 합류했다.

하루종일 영상만 볼 수 없잖아

많이 아프진 않아도 기력이 떨어져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아이와 TV 앞에 나란히 앉아 유튜브를 보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을 익히고 못 봤던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우리가 거실에서 깔깔 웃으면 상황이 바뀌어 옷방에서 격리하고 있는 남편(혼자 코로나에 걸리지 않음)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지금 뭐 보는 거야?" 하고 큰소리로 물었다.

하루종일 영상을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눈이 아픈 것 같기도 멀미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심각한 책을 읽기는 싫다. 그때 책장에 꽂힌 <어쿠스틱 라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난다 작가의 <어쿠스틱 라이프>야 말로 체력이 떨어진 이때 딱 읽기 좋은 작품이다. 고도의 집중력 없이도 저절로 몰입되고 일상툰이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게다가 책의 형태라 TV를 볼 때와는 달리 죄책감이 들 염려도 없다.

작가 난다는 2010년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어쿠스틱 라이프>로 데뷔하고 2011년 <어쿠스틱 라이프> 1권을 출간한 이후 2020년까지 14권을 출간했다. 이런 꾸준함과 긴 호흡을 어떻게 하면 갖게 되는 것일까. 난 감탄하며 오랜만에 책장에 꽂힌 <어쿠스틱 라이프 9>를 꺼내 들었다.

역시나. <어쿠스틱 라이프>가 가진 매력이 있었다. 큭큭 웃으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나도 모르게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뒷담화를 들었어도 엄마의 완전한 사랑을 하나 확보하고 있어서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어린 딸을 웃게 하려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이상한 댄스를 추는 이야기 등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릴적 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책.
▲ 어쿠스틱 라이프 시리즈  어릴적 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책.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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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어쿠스틱 라이프 12, 13, 14권을 내리 읽었다. 모든 내용이 다 재미있었지만, 가장 마음에 남는 건 13권에 나오는 아이에게 예쁨 받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을 끝낸 난다에게 어린 딸 쌀이가 수고 많았다며 손을 잡아주고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예뻐한다.

'그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책을 읽다 말고 예전 일을 떠올렸다. 만원 버스에서 "엄마는 나의 영웅이야"라고 여러 번 말해 주변 사람들이 피식거리며 웃던 일. 또 다른 버스에서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연예인보다 더 예뻐"라고 해서 사람들이 날 힐끔힐끔 쳐다봤던 일.

그땐 매일 아이의 유치원 가방에서 어설픈 글씨로 쓴 '엄마 사랑해'라는 색종이가 나왔다. 남편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전히 나란 존재로 사랑받는 느낌을 아이 덕분에 알게 됐다. 지금은 자주 목소리를 높이고 가끔은 얼굴을 붉히는 사이지만 나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준 귀한 존재다. '그래, 우리 딸은 그런 애였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나 혼자 감상에 젖는다.

한창 육아몰입기를 지날 때는 나보다 육아에 덜 신경 쓰는 남편이 부럽기도 했는데 <어쿠스틱 라이프>를 읽으며 생각해 보니 남편은 나보다 아이에게 사랑받은 에피소드가 적을 것이란 생각에 오히려 안쓰러워졌다.
  
아이에게 사랑받는 기쁨에 대한 에피소드 중.
▲ 어쿠스틱 라이프 13권 중 (1) 아이에게 사랑받는 기쁨에 대한 에피소드 중.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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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서운했지만

코로나19로 격리되어 답답했는데 이 시리즈를 읽으며 격리된 이 시간을 감사하게 됐다. 아이에게 잔소리와 설득과 제안을 하지 않는 일주일이었다. 공부를 안 하냐는 잔소리도, 주말인데 밖에 나가서 놀자는 설득이나 제안도 없었다(아이는 집순이인 반면, 남편과 나는 나가서 노는 걸 좋아한다).

격리 후반에는 몸 상태가 괜찮아졌음에도 자고 싶을 때 자고 아이가 보는 유튜브를 함께 보고 아이도 내가 보는 <어쿠스틱 라이프>를 함께 봤다. 자연스레 아이의 어릴 적 이야기도 나눴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에게 벌써 사춘기가 온 것 같아 조금은 서운했다. 예전처럼 미주알고주알 학교에서 있던 일을 말하지도 않고 학교에서 오면 방에 들어가 방문을 꽉 닫는다. 난 아이가 방에서 무엇을 할까 궁금해 무척이나 방문을 벌컥 열고 싶지만 아이가 싫어해서 노크를 하고 들어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똑똑똑 노크를 하고 거의 바로 문을 열게 된다.

유튜브로 <유 퀴즈 온 더 블록> 170화에 서울대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김붕년 교수님이 나온 걸 우연히 보게 됐다. 사춘기는 뇌 발달 과정상 전두엽 조절 능력은 떨어지고 분노, 불안, 공포가 심해지는 시기라고 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부모의 통제보다는 '연민'이 필요하단다. '감정의 파도 속에서 네가 힘들구나' 하는 연민.

또한 부모가 여유를 가지고 아이의 버릇 없는 태도를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다. 유재석이 교수님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 물으니 아이의 어릴 때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작았던 네가 지금 이만큼 컸구나' 하고 아이의 어릴 적을 생각하면 된다고 하셨다.

'오, 내가 <어쿠스틱 라이프>를 읽고 했던 일이잖아! 이미 전 하고 있답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한다. 추운 겨울 사춘기 아이의 차가운 말에 마음도 추워질 때, <어쿠스틱 라이프> 시리즈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아이를 향한 잊었던 사랑이 다시 퐁퐁 솟아날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은 달라 오늘 난 또 아이에게 언성을 높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상황에서 한 걸음 떨어져 조금 전 내 행동을 반성한다. 내가 열두 살이었던 천방지축 시절도 생각한다. 너무 다른 나와 딸이어서 비교할 순 없지만 감정이 휘몰아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건 알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이가 열두 살인 지금 이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거란 것도 알겠다.
  
아이에게 사랑받는 기쁨에 대한 에피소드 중.
▲ 어쿠스틱 라이프 13권 중 (2) 아이에게 사랑받는 기쁨에 대한 에피소드 중.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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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한 장면처럼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나에게 큰 사랑을 주었던 아이를 기억하며 아이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사랑을 주는 엄마가 되자고 다짐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어쿠스틱 라이프 14

난다 (지은이), 문학동네(2020)


어쿠스틱 라이프 12

난다 (지은이), 문학동네(2020)


어쿠스틱 라이프 13

난다 (지은이), 문학동네(2020)


어쿠스틱 라이프 9

난다 (지은이), 문학동네(2020)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태그:#어쿠스틱 라이프 , #코로나19, #사춘기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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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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