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9 13:31최종 업데이트 22.12.1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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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라이브 영상 중 한 장면. ⓒ 유튜브 이랑 Lang Lee 갈무리

 
가수 이랑은 올해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에서 자신의 곡인 '늑대가 나타났다'를 공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해당 곡의 공연도 행사에 출연도 할 수 없었다. 그 과정이 석연치 않다.

'늑대가 나타났다'를 공연 목록에서 빼달라는 행정안전부(행안부)의 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공연 2개월 전부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연습에 매진한 가수와 연출자가 이를 승낙하기는 어려웠다. 요구를 거절한 후 공연자와 연출자가 교체됐다. '검열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강상우 감독은 재단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를 빼라는) 지시를 수행하지 않으면 재단의 존립이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고 언론에 전했다. 행안부는 '미래 지향적인 밝은 느낌의 기념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 검열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사태의 전말은 짐작만 가능할 뿐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이 정부가 얽힌 일은 늘 이런 식이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놓고 정부의 행보가 노래를 현실에서 완성했다고 비판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봉기 혹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주체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약자들이다.

자식이 죽은 가난한 여인, 부자들에게 좋은 빵을 모두 뺏긴 걸 알아버린 굶주린 이들,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 이들이 성문 앞으로 모이자 성에 사는 사람들은 마녀·폭도·늑대·이단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그리고 성문을 굳게 닫아버린다.

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는 약자들이 감히 성문으로 걸어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노래가 아주 불편하게 여겨졌을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결과는? 그들은 노래처럼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늑대라고 지목한 이들을 내쫓고. 이 노래를 거부한 사람이 대중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겠다.

장애인 앞 예외 없이 굳게 닫힌 문

지난 14일에는 서울시 지하철 4호선 한 대가 삼각지역을 무정차 통과했다. 서울시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시위가 벌어지는 역을 무정차 통과하는 방안을 검토한 지 며칠만의 일이다.

이런 검토의 배경에는 대통령실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교통공사는 자사의 SNS 계정과 휴대폰 앱인 '또타지하철'을 통해 이 같은 조치가 '열차 지연으로 인한 불편을 감소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빠르게 알렸다.

하지만 해당 계정을 팔로우하거나 앱을 사용 중인 사람은 알 것이다. 다른 일에는 이들이 자주 잠잠하다는 것을. 일례로 얼마 전 내가 탄 서울 2호선 열차가 출입문 고장으로 출발이 수십 분간 지연되는 일이 있었다. 결국 열차가 신도림역에 도착했을 때 평소 해당 시간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인파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서울교통공사의 SNS나 앱은 조용했다. 한 명이라도 저 인파를 피할 수 있도록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 
 

13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이 가까운 4호선 삼각지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주최 ’장애인권리 무정차 규탄! 23년 장애인권리예산 반영 촉구! 247일차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이 열린 가운데 방패를 든 경찰 수십 명이 배치되어 있다. ⓒ 권우성

 
무정차 통과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치고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라는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의 말에 수긍이 가는 이유다. 열차를 타야 할 곳에서 타지 못하게 만들고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하게 만든 다음 그 원인으로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지목하는 건 손쉬운 혐오 선동이다. 그리고 이건 '왜 그런 시위를 하게 되었는지' 질문하지 말라는 무언의 지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초에 전장연의 요구가 그렇게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었을까. 이들은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함께 살아갈 권리를 보장할 예산을 요구했을 뿐이다. 이는 시민으로 함께 사는 이들에게 근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는 전장연이 요구해 온 내용이 담겨있지 않았다. 올해만 해도 지난 4월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승강장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던 휠체어 사용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했다. 그런데도 서울시도 교통공사도 전장연의 요구에 응답하는 대신 시위대 앞에서 문을 닫고 지하철을 통과시켜 버렸고 대통령실은 이를 부채질했다. 다시 한번 성문이 굳게 닫혔다.

대상이 없는 책임과 추모 

지난 12일 10.29 참사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 A씨는 참사 당시 극적으로 구조되었지만 동행했던 친구를 잃었다고 한다. A씨는 보건복지부에서 심리 지원을 위해 파악했던 생존자 및 유가족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보건복지부 관계자에 따르면 A씨 본인과의 연락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개인 상담을 이미 받고 있다는 부모의 말에 지원 요청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안은정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위원회 피해자권리위원회 활동가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에서는 공개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먼저 찾지 않았다고 기다리고만 있었다는 것은 문제'라고 밝혔다. 개인적으로 이 죽음은 10.29 참사가 그랬듯 행정력이 잘 발동되었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상실이 매우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10.29 참사 이후 선포된 국가 애도 기간의 풍경을 기억한다. 참으로 이상한 순간이었다. 대통령은 연일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영정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에서 도대체 누구를 애도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부 인사들과 함께 5일 오전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지난달 31일 이후 엿새 연속으로 조문했다. 정부가 마련한 합동분향소에는 희생자들의 영정도 위패도 없다. ⓒ 유성호

 
시간이 흘러 유가족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물을 책임에 대한 응답과 위로를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하지만 유가족 협의회의 간담회 요청에 여당은 불참으로 답했다(관련기사: 무릎까지 꿇었지만... 간담회 국힘 불참에 분노한 유가족들 http://omn.kr/21uaa).

경질을 요구받은 참사의 책임자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물러날 것처럼 얘기했지만 유가족 협의회와의 소통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장관의 해임 요구에 대해 대통령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현재까지 사망한 A씨에 대한 메시지도 없다. 대신 총리가 한마디 하긴 했다. '본인이 좀 더 굳건하고 치료 생각이 강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완벽한 무시

통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제도는 다양한 약자와 소수자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구성될 것이다. 문제는 제도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권력이 소수자와 약자들을 착취하거나 분리하고 노골적으로 계층화하여 관리하는 광경은 역사에서 자주 벌어져 왔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전략이 추가되었다. 완벽한 무시. 약한 자들이 죽건 살건 방치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기. 이들의 존재가 권력 유지에 도움이나 문제가 될 때만 신경 쓰는 척하다 그렇지 않을 때는 등을 돌려버리기. 이런 국가가 약자들과 대면하는 건 참다못해 소란을 일으킬 때인데 그 방식이 진압이나 사회적 매장뿐이다. 솔직히 현 정부의 행보를 보고 있으면 '너희가 어떻게 살든 혹은 죽어도 관심 없으니 조용히만 해라'는 메시지만 읽힌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발표 당시부터 시대를 상징하는 곡이었다. 이랑 특유의 은유적이지만 동시에 날카롭고 거침없이 직설적인 가사는 이 노래가 시대의 어떤 부조리에 항변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이태원참사 발생 47일째인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부근 이태원 광장에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마련한 합동분향소가 설치됐다. 정부 합동분향소와 달리 영정과 위패가 놓였다. 한편 분향소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보수단체가 내건 ‘이태원 참사 추모제 정치 선동꾼들 물러나라’ ‘윤석열 잘한다’ 현수막이 걸려 있다. ⓒ 권우성

 
굳게 닫힌 성문. 폭도, 이단, 늑대, 마녀가 되는 성 밖의 가난하고 약하고 평범한 사람들. 나는 더는 이 노래가 시대를 상징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성문이 열리고 벽이 허물어지고 그 누구도 무시되지 않은 채 모두가 함께 잘 살 방법을 고민하는 시대가 와야만 그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노래에서 점점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늑대가 나타났다'가 항변하는 그 부조리와 잔인함에 노골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의 배후에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깨울 수 없다면 움찔하고 위협을 느낄 수 있도록 밀치기라도 해야 한다. 노래의 가사처럼 이 땅에 큰 충격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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