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2 13:15최종 업데이트 22.12.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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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통합 추진성과 및 전략 보고회에 참석하고 있다. ⓒ 대통령실

 
개정 교육과정에 자유민주주의 표현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우려와 반발이 적지 않은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강경 발언을 계속 내놓고 있다. 지난 13일 국무회의 때는 "자유민주주의를 깨려는 세력은 끊임없이 거짓말로 선동"한다며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21일 국민통합위원회 보고회 때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을 가진 대규모 세력들"에 대한 경계심을 언급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글자 자체는 좋은 말이지만, 이를 유별나게 강조했던 세력들은 우리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5·16 쿠데타 4개월 뒤인 1961년 9월 16일, <조선일보>에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2)'를 기고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이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가장 큰 당면 과제는 인간을 마치 노동의 도구처럼 혹사하는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참다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앞서야 될 경제부흥이다"라고 말했다. 경제부흥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에 도달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박정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유신체제를 선포한 직후에도 '유신은 자유민주체제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신 선포 일주일 뒤에 발행된 1972년 10월 24일 자 <경향신문> 기사 '비능률·사대 뿌리 뽑아 유신개혁으로 자유체제 수호'는 이렇게 보도했다.

"박 대통령은 24일 제27회 유엔의 날을 맞아 '우리는 지금 국제정세의 급변·혼란과 파쟁·비능률 그리고 사대주의적 사고방식 등 자유민주체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대내외적 도전을 받고 있다'고 지적, '이런 모든 것을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뿌리 뽑고 우리 자유민주체제에 활력소를 불어넣기 위해 일대 개혁을 단행 중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이 자유민주정권으로 자처하는 일은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때도 있었다. 그해 5월에 광주 학살을 자행한 그는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착시켜야 할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되 우리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고, 국정운영상의 비능률을 제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자유경쟁원칙하에 고도의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고유한 민족 전통과 문화 배경에 합치되어야 합니다."

독재정권들의 캐치프레이즈

독재정권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절절하게 강조했지만, 막상 국민들이 자유를 외치면 무슨 소리냐는 듯 낯빛을 바꾸었다. 독재정권하에서 국민들이 절실하게 희망한 것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대학의 자유, 노동자의 자유 등이었지만, 이런 열망들은 번번이 짓밟혔다.

독재정권들은 자유민주가 자신들의 캐치프레이즈인 듯이 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이것의 '원저작권자'는 일반 대중이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의 핵심 구호에도 '자유'와 '민주'가 있었다.

그해 4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 '서울·부산·청주서 대규모 데모'는 "고려대학교 학생 삼천여 명은 18일 하오 1시경부터 안암동에 있는 동(同)대학교의 교문으로부터 물밀 듯이 밀려 나와 '자유·정의·진리 드높이자', '민주역적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는 외침은 이승만 정권뿐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도 당연히 분출됐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던 독재정권들은 이럴 때마다 논리를 슬며시 바꿨다. '자유'를 '방종'으로 바꿔치기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냈다.

쿠데타 직후는 물론이고 유신 선포 직후에도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했던 박정희는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와 저항이 거세지자 '그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1976년 1월 5일 자 <매일경제>는 "박 대통령은 4일 스톡홀름에서 공개된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확립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인터뷰에서 박정희는 '자유'를 '무책임' 및 '방종'과 동일시했다. "무책임과 방종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게 그의 메시지였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 1981년 1월의 전두환도 거의 똑같았다. 그달 8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1월 3일 자 이집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개인의 자유는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존중되어야 하고, 우리는 방종과 무질서를 허용할 수 없으며,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1981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전두환은 이집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의 자유는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존중되어야 하고, 우리는 방종과 무질서를 허용할 수 없으며,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자유민주주의 강조하며 탄압

독재정권들은 국민들의 자유 요구를 방종이자 무질서, 무책임으로 매도했다.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유별나게 강조하면서도, '자유는 방종'이라 적힌 옐로카드를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있었다. 독재정권들이 말하는 자유민주는 달라고 한다고 해서 주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막상 달라고 하면 자유가 아닌 폭정을 선사하는 것이 독재정권들의 패턴이었다.

그런 정권들을 상대로 국민들이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고 독재정권들이 '자유는 방종'이라며 국민을 억압하는 모습이 얼마나 모순되고 부조리한가는, 전두환 정권하의 관제 야당들이 자유 보장을 요구한 일에서도 느낄 수 있다.

1983년 10월 25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25일 오전 국회 정당대표 연설에서 민주정의당 2중대인 민주한국당의 오홍석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은 언론 및 대학의 자유를 촉구했고, 3중대인 한국국민당의 이성수 정책위원회 의장은 재야세력 및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를 촉구했다. 관제 야당들이 국민들을 의식해 이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두환의 자유민주주의가 객관적으로 허울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를 외치는 윤석열 정권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을 계승하고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이념적 혹은 정서적으로 따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할 때는 특별한 조심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정권의 선배 정권들이 자신과 똑같은 말을 하면서 폭압 정치를 감행한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요즘 들어 자주 강조되는 윤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가 박정희·전두환의 자유민주주의와 차별성을 가지려면, 윤 대통령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프리드먼의 자유시장경제 논리가 재벌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된 점을 감안하면, 프리드먼의 사상을 국정운영에 반영하는 것이 다수의 대중과 소수의 재벌 중 어느 쪽의 자유를 더 증진시킬지는 명약관화하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비정한 대응에서도 나타났듯이 윤 대통령은 노동자 대중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기업 위주의 논리를 담은 <선택할 자유>를 높이 평가하는 그의 모습과 맞물리는 측면이다. 기업가로 살아가는 국민보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국민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자유 증진보다 기업가의 자유 증진에 더 치중하는 것이 일반 국민들에게 유리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윤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가 박정희·전두환과 다름을 보여주려면,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에 대한 태도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언론탄압을 일삼았던 박정희·전두환과 다르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박정희·전두환의 자유민주주의가 허구라는 점이 노동자 대중과 언론·표현의 자유에 대한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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