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0 19:33최종 업데이트 23.01.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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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 윤석열 정부는 또 다른 'MB' 사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8년 11월에 대법원이 불법행위책임이 있다고 선고한 미쓰비시(MitsuBishi)다. 대법원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진행 중인 국내 자산 현금화 절차를 중단시키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강제징용(강제동원) 해법을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공개토론회가 예정되어 있다. 행사를 공동 주최하는 외교부와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등이 한국에서 더 이상 소송을 당하지 않게 만들고,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국 기업 기부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이 아닌 변제 혹은 보상을 하게 만드는 쪽'으로 사안을 이끌어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종 단계'에 돌입했다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다. 7일자 <요미우리신문> 등에서는 윤 정부의 처리 방향에 따라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할지 말지를 결정하리라는 보도가 나왔다. 같은 날 <TV 아사히 뉴스>는 기시다 내각이 초봄까지는 지켜볼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관련 기사 : 기시다 내각의 윤 대통령 '일본 초청'? 숨은 속내)

대법원이 선고를 내린 미쓰비시 등에 전쟁범죄 책임을 더 이상 물을 수 없게 되면, 한국은 일본과의 역사문제에서 또 다른 장애물을 갖게 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은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처리 규정 없이 국교를 정상화시켰고,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는 제대로 된 사과와 더불어 피해배상 없이 문제 봉합을 기도했다.

어느 하나도 식민지배 문제를 종결시키지 못했는데도, 일본은 '다 해결됐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내세우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윤석열 정부가 강제징용마저 굴욕적으로 봉합하면 가해자 측은 더 당당해지고, 피해자와 한국 국민들은 한층 높은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번 공개토론회는 그런 장벽 앞으로 한국을 안내하는 기능을 할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하는 사도광산
 

9일(현지시간) 유럽을 순방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중앙)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과 함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복구 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외신들은 이날 기시다 총리가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사도광산에 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 연합뉴스

 
미쓰비시 사면을 향해 달려가는 윤석열 정부가 징용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니가타현 사도섬 사도광산 문제와 관련해서도 드러난다.

양금덕 할머니 등에게 노예노동을 강제한 미쓰비시중공업뿐 아니라, 사도광산에서 한국인 2300명 정도(히로세 데이조 후쿠오카대 명예교수의 추산)에게 강제노역을 시킨 미쓰비시광업 역시 미쓰비시그룹의 일원인데도 윤 정부는 사도광산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제 미쓰비시머티리얼로 불리는 미쓰비시광업의 사도광산을 세계 인류의 유산으로 만들려 한다.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은 물론이고 반성과 사과도 없이 사도광산을 자랑스러운 일본 유산으로 내세우고 있다.

<로이터통신> 일본어판 기사 '수상, 사도광산 등록 설명'을 비롯한 10일 자 보도들에 따르면, 지금 유럽을 순방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나 세계유산 등재에 관한 '이해'를 구했다.

기시다 총리의 부탁을 받은 아줄레 사무총장은 전쟁으로 문화재 손실을 입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본과의 협력을 일층 강화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금전 지원 등을 무기로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를 관철시킬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드는 발언이다. 일본이 이런 방식으로 등재를 실현시키면, 징용으로 인한 피해 배상에는 돈을 쓰지 않으면서 그 현장을 세계유산과 관광지로 만드는 데만 돈을 쓴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본 외무성의 공식 표명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징용 문제는 북한 문제와 더불어 한일 간 최대 현안이다. 일본은 피해자와 유족의 호소를 외면하는 쪽으로 문제를 봉합 중이다. 이런 일본 정부가 대표적인 징용 노역장 중 하나인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한국 정부가 그런 기시다 내각과 합세해 미쓰비시 사면에 속도를 내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미쓰비시그룹이 한국인들에게 입힌 상처는 일본인들도 차마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히로세 데이조 교수는 2000년에 <니가타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부 기요> 제3권에 실린 '사도광산의 조선인 노동자 1939~1945'에서 "매우 가혹한 갱내 노동"이 있었다며 쟁의와 도주가 속출하고 사망과 부상도 많았다고 고발했다.

일본 정부가 최소한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에서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갱도.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도광산의 가혹한 실상은 윤석열 정부 아래서 징용문제를 봉합 중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이 재단이 2019년 발간한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등장하는 피해자 임태호는 1919년에 충남 논산군에서 태어나 21세 때인 1940년에 사도섬으로 징용됐다.

보고서는 "임태호가 하는 일은 지하에서 광석 채굴이었다"라며 "매일 같이 낙반 사고가 있어서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를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이고 살았다"는 그의 회고를 전한다. 한번은 그가 작업 중에 발판이 떨어져 허리에 중상을 입었다. 들것에 실려 갱 바깥으로 나간 직후부터 의식을 잃은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함바였다. 그는 그 식당 한 켠에서 열흘 정도나 누워 있었다. 중상을 입은 환자를 그곳에 방치했던 것이다.

병원에도 못 가보고 작업장으로 복귀한 그는 또다시 중상을 입어 이번에는 손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탈출을 시도한 그는 사도섬은 탈출했지만 일본열도는 탈출하지 못했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도쿄 남쪽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정착해 살다가 1997년 생을 마감했다.

위 회고담은 죽기 직전에 구술로 남긴 것이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진심 어린 한마디를 들은 적이 없다", "나와 같은 경우에 있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 성의 있는 진정한 사죄를 받기를 원한다"는 말도 함께 남겼다. 이런 회고담을 보고서에 담아 발표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미쓰비시 만행을 은폐하는 데 가담하는 현실은 서글픈 일이다.

사도광산 강제징용이 말 못 할 고통을 줬다는 점은 1940년 2월 17일 한국인 피해자 40명이 집단 저항한 사실, 그해 4월 11일 한국인 97명이 파업을 벌인 사실, 1942년 4월 29일 한국인 3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동료 160명이 사무소에 난입했다가 그중 8명이 체포된 사실 등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도광산 측이 담배를 배급할 때 작성한 문건에도 그런 상황들이 묻어 있다. 광산 측이 피해자들에게 배급한 일을 글로 남긴 그런 문서에서도 한국인들의 처지를 느낄 수 있다.

지난 12월 31일 <한일민족문제연구>에 수록된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의 논문 '조선인 연초배급명부로 본 미쓰비시광업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은 "이 명부는 동원 이후의 이동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라고 한 뒤 "탈출, 형무소 수감, 노동재해 등 다양한 모습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논문은 배급 문서를 근거로 1945년 6월 20일 한국인 7명이 탈출했다가 3명이 붙들린 일, 체포된 사람들이 형무소에 수감된 일, 27명이 휴가를 받아 나갔다가 복귀하지 않은 일, 부상으로 신체장애를 입은 상태로 다른 데로 전근 간 일 등을 소개한다. 일본 측의 주장대로 미쓰비시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만 해줬더라도, 최소한의 봉급만 지급했더라도 피해자들이 돈 받을 게 많은데도 틈만 나면 도망하거나 저항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미쓰비시의 사도광산을 놓고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된다는 것은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가 최소한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가 그들과 협력해 미쓰비시 사면을 추진하고 한국인 피해구제를 가로막는 것은 피해자와 유족은 물론이고 한국 국민들을 거듭거듭 짓밟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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