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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1932년 4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단원 윤봉길이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상하이 홍커우공원 무대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홍커우공원 의거)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 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비롯한 일본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등 일본군의 고위 장성과 정부 요인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윤봉길의 배후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상하이에 남아있던 한인들은 더 이상 보호받지 못했다. 그동안 자국 조계 내에서 활동하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줬던 프랑스 조계 당국도 일제의 한인 체포에 협력했던 것이다.

흥사단의 창립자이자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도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됐다. 이듬해인 1933년 11월 22일에는 상하이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 이사장이었던 김석(金晳)이 프랑스 조계 찐션푸로(金神父路) 중난반점(中南飯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과 프랑스 공동국(公董局) 경찰의 공동 작전에 의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상하이 한인 사회는 물론 상하이 시장 등 중국 정부까지 나서서 "김석은 귀화한 중국인"이라며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에 귀화가 무효"라는 논리를 내세워 김석을 일본 측에 인도했다.

당시 상하이 주재 프랑스 총영사 쟈크 메이리에(Jacques Meyrier)가 베이징 프랑스 대리공사 오프노에게 보낸 전보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프랑스 조계 당국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 조계에서 한국혁명가들의 활동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조계에서 추진된 음모에 관해 말하고 있고, 일본 영사관을 폭파하고 일본 공사를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이 담긴 일본 영사의 서신의 사본을 동봉하겠습니다. 만일 저희가 일본 당국을 원조하지 않는다면, 살인과 같은 돌발사건이 저질러질 경우에 저희는 극도로 어려운 입장에 놓일 것입니다." - 상하이 프랑스 영사 메이리에, <김석 정보 요청에 대한 회신(2)> (1934.1.31)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 shanghail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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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사 암살을 계획하다

프랑스 당국에 대한 상하이 한인 사회의 불만도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34년 초 프랑스 영사관 경찰이 일본 당국에 협조한 것을 두고 불만을 품은 한인 급진주의자들이 프랑스 영사 메이리에와 경찰국장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가 프랑스 영사관 내에 돌았다. 

그해 5월 말, 첩보의 실체가 확인됐다.

"프랑스 조계 당국의 이른바 친일과 반한국 정책으로 몇몇 주요 한인 집단에 있는 불만을 이용하여 박창세(朴昌世)라는 한인 전투혁명가가 1934년 초부터 프랑스 영사 메이리에(MEYRIER)에 대한 테러를 획책하는 계획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4월 28일 박창세는 세 명의 지지자와 함께 난징으로부터 와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서 프랑스 영사가 출석하는 가운데 개최 예정이었던 열병식 중에 테러를 획책할 목적으로 약간의 폭탄과 권총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 열병식의 연기로 같은 날 상하이를 떠났던 박창세의 계획이 틀어졌다. 무기들은 상하이-항저우 노선의 가흥(Kashin)에서 기차로 운반되었으며, 나창헌(羅昌憲)과 강창제(姜昌濟)가 소지하고 있었다.

(…중략…) 이 테러단체의 4번째 단원 문일민(文逸民)은 현재 난타오(Nantao), Lou-Pei-Iou, Sing-Sing-Ii, 1호에 거주하고 있다." -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관 경무국 정무과, <박창세의 상하이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 (1934.5.27)


첩보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프랑스 조계 당국의 친일(親日)·반한(反韓) 정책에 불만을 품은 한인 급진주의자들이 프랑스 총영사 암살을 감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프랑스 영사관은 그 혐의자들로 박창세·나창헌·강창제 그리고 문일민을 지목하고 있었다.

이들이 거사일로 잡은 4월 29일은 쇼와(昭和)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로 홍커우공원에서 이를 기념하는 열병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프랑스 영사는 물론 일제의 고관대작이 한 자리에 모이는 흔치 않은 자리였으므로 대규모 테러를 벌이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2년 전 이날, 같은 장소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진 바 있었다. 거사 추진 세력은 거사일을 정하면서 윤봉길 의거 2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고려했을 법하다. 어쩌면 이들은 '제2의 윤봉길 의거'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하이 주재 프랑스 총영사 쟈크 메이리에(Jacques Meyrier) (출처: http://shanghaitours.canalblog.com/archives/2017/02/19/34956849.html)
 상하이 주재 프랑스 총영사 쟈크 메이리에(Jacques Meyrier) (출처: http://shanghaitours.canalblog.com/archives/2017/02/19/34956849.html)
ⓒ Hong Kong & Shanghai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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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첩보는 일본 영사관에 출입하며 밀정 노릇을 하던 박창세의 아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변절했던 아들이 아버지 박창세의 계획을 고발한 것이다. 첩보를 입수한 프랑스 영사관에서도 "아버지를 고발하도록 그의 아들을 압박할 수 있는 이유가 어렵게 납득이 된다"며 신뢰할 수 있는 정보로 판단했다.

또한 당시 일제의 독립운동가 체포에 협조적이었던 프랑스 영사관에 대한 한인들의 불만이 상당했다는 점, 영사관이 파악한 첩보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실제로 계획이 추진됐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된다(그러나 해당 첩보 외에 다른 어디에서도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는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에 가담한 이들의 인적 구성을 살펴보면 강창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멤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이 흥사단 차원의 계획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일민을 비롯하여 해당 계획에 참여한 이들 다수가 흥사단 멤버였다는 점은 그들 나름대로 무실역행·충의용감이라는 흥사단 정신의 실천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었나 한다.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은 흥사단뿐만 아니라 적 기관 파괴와 밀정 암살 등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까지 함께 하는 차원의 계획이었던 것 같다. 거사에 가담한 박창세·나창헌·강창제는 병인의용대 대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병인의용대원 명단에서 문일민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일민 외의 3명 모두가 병인의용대원들이었으며 병인의용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인물들의 특징(흥사단계·평안도계·한국독립당계)을 종합해보면 이에 전부 해당하는 문일민 역시 병인의용대 멤버였을 확률이 높다. 비밀결사라는 특성상 문일민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을 공모한 나창헌·강창제·문일민(왼쪽부터). 박창세의 사진은 전하지 않는다.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을 공모한 나창헌·강창제·문일민(왼쪽부터). 박창세의 사진은 전하지 않는다.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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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요컨대 문일민 일파의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은 흥사단의 혁명노선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안창호 체포 등 한국 독립운동 탄압에 대한 적개심이 더해져 프랑스 영사에 대한 테러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당시 박창세는 거사를 상의하기 위해 김구를 방문했다. 그러나 김구는 박창세 등의 계획에 단호하게 반대하고 중지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구가 프랑스 영사 암살을 반대한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김구는 그 자신이 한인애국단이라는 의열단체를 조직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을 배후에서 조종했지만 어디까지나 적국이었던 일제 수뇌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 제3자에 대한 테러를 시도한 적은 없었다.

국제 사회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받기 위해 분투해왔던 김구 입장에서는 프랑스 영사 암살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판단했을 법하다.

만에 하나 거사가 성공했을 경우 그것이 한국 독립운동의 미래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을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문일민 등의 프랑스 영사 암살 계획을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 12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9·32, 국사편찬위원회, 2008·2009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한국독립운동 사료> 3,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 2016
윤대원,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윤대원, <제국의 암살자들>, 태학사, 2022
조철행, <의열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나창헌>, 역사공간, 2015
이명화, <興士團遠東臨時委員部와 島山 安昌浩의 民族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이명화, <興士團 遠東臨時委員部의 人的 構成과 그 性格>, 《한국근현대사연구》 22, 한국근현대사학회, 2002
조범래, <丙寅義勇隊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독립운동가, #흥사단, #병인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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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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