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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는 않는데 이제는 바닥에 안 나갑니다.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작년 가을부터 집에서 쉬고 있어요. 심심하기도 해서 노인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전남 완도군 청산면복지회관에서 만난 청산도 해녀 강복연(76)씨의 첫마디이다.

강복연 해녀는 4․3 사건이 한참인 1948년 제주도의 또 다른 섬인 우도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제주도 여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강복연 해녀 역시 8살이 되자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갓물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11세가 되자 우미(우뭇가사리)를 뜯고 13세에는 미역을 채취하는 등 물질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다 드디어 18세 때 어른들만 참여하는 먼 바다 물질에 나서 미역을 채취했다. 우도의 새로운 별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우리 마을이 130호가 넘어요. 친구들이 15명 정도 됐는데, 나 혼자 상군해녀들과 함께 깊은 곳에서 미역을 딸 수가 있었어요."

그런 강복연 해녀는 19세가 되자 다른 해녀들처럼 육지로 첫 원정물질에 나섰다. 해녀 모집책이 알선해 준 곳은 구룡포였다.

"엄청나게 부푼 가슴으로 원정물질에 나섰는데 큰 돈을 벌지 못하고 경험삼아 다녀왔어요. 다음에 다시 가기로 했는데 20살 때는 청산도로 갔습니다." 

강복연 해녀가 청산도로 물질을 온 이유는 사촌언니인 김정자(작고)씨가 결혼해 청산도에서 물질을 하고 있었는데 불러서 왔다고 한다. 매년 200~300명 정도가 왔는데 강씨 역시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강씨는 이후 3년을 연속해서 청산도로 오게 됐다.

"당시는 육지물질을 오면 방을 얻어 합숙을 했는데 옆집에 잘 생긴 총각이 있었어요. 가끔 과자를 사서 던져주기도 하고 고구마를 삶아 보내기도 하고 우리에게 아주 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됐다.

슬하에는 아들과 딸 2명씩 4남매를 뒀다. 큰아들은 중국의 한국법인 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큰딸과 작은 아들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막내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지내며 버지니아에서 살고 있다.

"신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애들은 어린데 앞날이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아야 되겠다 생각하고 물질도 열심히 하고 겨울이면 제주도의 밀감농장에서 밀감을 땄습니다. 그때 일당이 2만5천 원이었는데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해 막내딸의 학교 기숙사비와 용돈을 조금씩 줄 수 있었어요."  

친정에는 1년에 한번 정도 다녀오는데 형제들이 제주시에 살고 있어 어릴 때 살았던 우도를 잘 가지 못한다고 한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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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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