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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오늘날 한국인들이 '갑신정변'이라 부르는 사건의 충격은 실로 컸습니다. 21세기 한국인들이 그 사건의 전모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당시의 시점에서 파악하고 체감한 것의 일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오늘은 내가 12월 20일자 부모님 앞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하겠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의 입장과 속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게 무척 궁금하였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시 일본 공사는 과연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개화파들과 함께 행동했던 것일까? 혹은 단순히 고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호적인 지원을 하려 했던 것일까? (이 경우라면 일본 공사와 왜병들은 개화파들에게 방패막이였던 셈이다) 과연 조선인들이 일본 공사관에 방화를 한 것일까?(그들은 아니라고 한다). 

아니면 중국에 대한 개전 명분을 찾고 있던 일본 공사의 자작극이었을까? 오랫동안 중국과의 전쟁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본이 당시 청불 전쟁의 상황을 이용하여 조선과 연합하여 조선내 청병과 일전을 벌이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한편, 고종 임금 부처는 갑신정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공사관이 불탔고 많은 일본인들이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지난 1882년 임오군란시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고 조선정부에 40만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헌데 얼마전에 일본이 태도를 누구러뜨려 배상건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차제에 갑자기 일본인들이 참변을 당하게 되자 고종 부처는 앞으로 벌어질 일본의 앙갚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국왕 부처는 우리 미국 공사관에 안전을 의존하려 했습니다. 당시 서울은 무법천지여서 외국인들이 황급히 떠났습니다.

고종 부처는 푸트 공사 부인이라도 남아서 민비를 지켜달라고 간청하였을 뿐 아니라 날더러는 조선 조정의 관리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날더러 왕의 신하가 되어달라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요. 

갑신정변은 개화세력의 전멸을 가져 왔습니다. '개화파=친일 매국노'의 단순 논리가 각인된 것도 이때였지요. 개화파들은 죽거나 국외로 망명했고 그 가족, 일가 친척들도 투옥되고 고문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입 달린 사람들은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언어로 개화파들을 욕했고 증오했지요. 민중의 증오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개화파의 전멸로 친청사대 보수세력의 세상이 되었다는 점이지요. 청나라의 족쇄는 더욱 조여올 것이고 조선의 앞날은 그맘큼 암울해질 것입니다.   

신변이 위태롭다고 여긴 푸트 공사는 내게 공사관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서울을 떠나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런 태도를 경멸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면  나는 어쩌면 서울애 남아 있는 유일한 외국 공사(대리)가 될 것입니다. 나의 신변에도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미국 군함 트렌턴Trenton호가 제물포에 입항하기는 했지만.

사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 조선에서 최초로 발간된 우표들을 구해 편지에 동봉했습니다. 우표는 5푼(문)짜리와 10푼(문)짜리, 이렇게 두 종류가 발행되었습니다. 달라로 환산하면 각각 0.5센트 및 1센트 상당이었지요. 이 우표는 잠깐 서울 시내와 서울-인천간에 통용되다가 곧 절판되고 말았습니다.

우표를 발행한 기관이었던 우정국 낙성식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하였기 때문이고 우정국의 수장인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동자에 속했기 때문이죠. 홍영식은 궁중에서 살해당했고 우정국도 쑥대밭이 된 채 방기되었고 우표도 당연히 중단되고 말았지요. 역설적으로 당시 잠깐 발행되었다가 졸지에 생명이 끊기고 만 그 우표들은 그 회소성과 역사성 때문에 우표 수집상들에게는 부르는 것이 값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 우표들이 뉴욕에서 한 매당 최소한 30불 이상 호가되리라 추산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30불 아래로는 파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우표들이 지금 미국 어디엔가 소장되어 있을텐데.

홍영식은 1883년 미국 방문시에 미국의 우편 통신 제도와 기술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하여 임금에게 주청하여 우정국을 열었던 것인데 그 모든 꿈이 허망하게 스러지고 말았지요. 홍영식이 미국출장애서 돌아와 고종에게 보고하던 중에 임금이 "일본과 가까이 지내다가는 그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을까 저어되오. 공의 생각은 어떠시오"라고 묻자 홍영식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배워 일본을 앞지른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때를 놓쳐 뒤처지고 만다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겠사옵니다." 실로 탁견이 아닐까요? 다음은 1884년 12월 20일자 부모님전 상서의 말미입니다.

"저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시길 기도 드립니다. 저는 안전하고 건강합니다. 많은 번뇌가 있고 골치 아픈 일도 많지만 그건 요즘같은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진실된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요. 부모님은 그것을 제 운명의 일부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저는 부모님이나 저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은 결코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기자들이 조선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으러 부모님을 방문하면, 그들에게 제 편지 내용을 전해 주세요. 비록 허술하더라도 제 편지가 다른 어떤 조선발 소식보다도 조선의 실상을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단 한가지, 제 편지 중에서 미국의 행동을 비판하는 내용이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 주십시오. 그런 내용은 진실된 것이지만 신문에 나가게 된다면 저의 공직 생활에 치영적이 될 것(fatal to my official career)이기 때문입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드리며. 조지 포크."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 #홍영식, #고종, #갑신정변, #최초의 조선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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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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