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8일 뮤지컬 <영웅> 캐스팅 보드.

지난 1월 28일 뮤지컬 <영웅> 캐스팅 보드. ⓒ 안정인


작년 9월, 일본 자위대가 독도 인근에서 욱일기를 달고 해상 훈련을 했다. 공식적인 '울릉군 독도 명예 주민증'을 소지한 1인으로써 심히 걱정스럽고 부끄러웠다. 12월에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중 한 분인 양금덕 할머니의 국민 훈장 서훈이 외교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답답했다. 급기야 한국 정부는 이미 판결이 끝난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우리나라 기업들이 배상해 주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막막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줄만 알았지 내 인생의 시계가 이렇게 뒷걸음질 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인생은 오래 살아봐야 아는 것인가 보다. 그래봐야 좋은 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요즘 유행하는 '꺾이지 않는 마음' 인지 모르겠다. 사방의 토착 왜구가 득세한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애국투사의 꺾이지 않는 삶을 확인하는 일이다. <영웅>을 보기 위해 다시 한번 길을 나선 이유다.

뮤지컬 영웅은 2009년에 초연된 작품이고, 이후 몇 번의 재연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얼마 전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다들 보지 말라고 말리는 통에 극장을 찾지는 않았는데, 뮤지컬을 기본으로 만들어졌다니 비슷한 줄거리겠지 싶다.

사실 뮤지컬 <영웅>의 줄거리는 좀 황망하다. 이 뮤지컬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암살 이후 재판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준비하는 상황과 민비를 모시던 마지막 나인인 '설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불이 켜지면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한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 마디를 자르며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단지 동맹' 장면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젊은이가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 다음 장면이다. 게이샤들이 나와 춤을 추며 이토 히로부미와 그 일행의 술자리 흥을 돋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들의 마음이 드러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민비의 궁녀였던 설희가 나타난다. 왜일까?

안중근과 설희의 이야기가 물리는 지점이 있긴 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역 도착정보를 '설희'가 알려줬다는 부분인데, 이건 당시 신문들을 너무 얕본 처사다. 이토 히로부미의 움직임 정도는 굳이 설희가 비밀 첩보 활동을 통해 빼내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는 정보다. 이런 장면을 만나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성 만큼이나 세상에는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야 하는 일'이 반드시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굳이 민비 살해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궁녀가 결연히 뛰쳐나가 마타하리가 됐다는 설정이 못마땅해서 내 심사가 뒤틀린 것일 수도 있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줄거리를 빼고 나면 이 뮤지컬에는 많은 미덕이 존재한다. 먼저 세트. 무대 감독이라는 직업이 쉬워 보인 적은 없지만, 뮤지컬 <영웅> 속 역할은 그중 최고의 난이도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뮤지컬의 배경은 조선에서 하얼빈으로, 일본으로, 달리는 객차로 쉴 새 없이 바뀐다. 그 모든 상황에 따라 무대 위에는 벽이 나타나고 흐르고, 달이 뜨고 눈보라가 휘날린다. 보고만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진다.

이만큼 장수하는 뮤지컬의 노래나 화음이 엉망일 리 없다. 안중근이나 설희, 우덕순처럼 자신의 역할이 있는 배우들뿐 아니라 코러스의 노래도 훌륭하다. 기립박수가 나온다. 여기에 더해 코러스들의 안무가 매력적이다. 관객이 줄거리를 툴툴댈 시간 없이 박력 있게 밀어붙인다. 좋다. 힘과 투지가 불끈 솟아오른다. 무릇 독립운동이란 이렇게 신나는 마음으로 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종류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터미션 후에는 계속 슬픔과 아픔의 물결이 밀려온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죽고 고난 받고 잡히고 처형된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 장면에는 이번에 새로 곱씹게 된 대사가 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를 말한다.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여기까지는 듣던 바다. 이어 "대한의 군대를 강제 무장 해제시킨 죄,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대한의 사법권을 동의 없이 강제로 장악 유린한 죄, 동양의 평화를 철저히 파괴한 천인공노의 죄"를 나열한다. 

북한이 보낸 무인기가 날아다녀도 '유선전화'로 통보하는 군대를 갖게 되고, 방송사에 보조금을 안 주는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없애는, 자본주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인 주가조작과 관련된 인물이 조사 한 번 받지 않는,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 다시 무장하는 상황에도 '이해한다'고 말하는 지도자를 바라봐야 하는 상황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안중근 중장의 대사가 새롭게 들린다. 비정상적인 일이 하도 벌어지다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게 되었는데, 크게 반성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후반부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글로 써 놓은 것만 읽어도 눈물이 나는데, 그걸 이런 극적인 장면에서 지켜봐야 하니 슬픔이 삼만배 정도 느껴진다. 티슈나 손수건은 각자 준비하시길 권한다.

오늘도 실력으로 증명한 안중근 의사역의 양준모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덕순 역의 윤석원 배우는 사투리도 찰지다.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본다고 편안하고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은 다잡게 된다.

나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들의 덕택으로 극장에 앉아 내 나라 말로 된 뮤지컬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도록, 역사가 백스텝을 밟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후손인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안정인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첨부파일 뮤지컬 영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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