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역할을 무시하고픈 마음은 없다. 때로 인간이 돌보지 못하는 고통을 종교와 신앙이 감당하는 광경을 목격해온 덕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나 많은 여리고 약하며 느린 것을 짓밟으며 굴러가지 않던가.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력 없이 앞만 보고서 달려가지 않던가. 낙오된 이에게 종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몇이나 되는가 말이다.
 
지금껏 제게 귀한 무엇을 잃은 이가 종교에 귀의하는 광경을 몇 차례쯤 보았다. 개중에서는 '종교는 나약한 이들이 의지하는 것'이라 우렁차게 떠들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가 감당하지 못할 상실 앞에서 스스로의 말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를 겪고 난 뒤 나는 인간이란 정말 커다란 고통 앞에 누구나 나약할 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창동 감독의 걸작 <밀양>도 종교가 가진 힘을 이야기한다. 범죄로 아끼던 자식을 잃은 여자는 교회를 통해 무너져가는 삶을 간신히 지지한다. 그녀 곁에는 그녀를 지탱할 인간도, 사회도, 국가도 부재하다. 그러니 그 종교의 존재가 나는 그렇게 고마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그러하듯 신앙에도 이면이 있다. 어느 신앙은 인간을 일으켜 세우지만, 어느 신앙은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성스러운 거미 포스터

▲ 성스러운 거미 포스터 ⓒ 판씨네마(주)

 
순교자의 땅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한 영화가 있다. 첫 장면부터 관객의 주의를 확 잡아끈다. 허름한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여자는 속옷도 걸치지 않고 얼굴을 꾸미는데 여념이 없다.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가슴과 그녀의 등판에 나 있는 멍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이내 잠든 자식에게 인사를 고하고 일터로 나간다. 그녀의 일터는 깜깜한 밤의 거리, 업은 몸을 파는 일이다.
 
상스럽고 무례한 사내의 욕정에 몸을 내주며 그녀는 끝없이 밑으로만 침잠해간다. 한탕으로는 어림도 없는 삶을 꾸려야만 하기에 그녀는 노파를 찾아서 약을 청한다. 기분이 너무나 엉망이라고, 공짜로는 안 된다는 노파를 설득해 아편 한 대를 얻는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시체가 되어 도시 어느 벌판에 들짐승처럼 버려진다. 카메라는 버려진 그녀의 시신 위로 고개를 쳐든다. 이 도시의 야경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중앙부 원형을 중심으로 쭉쭉 뻗은 도로가 사방으로 났다. 순교자의 땅, 이란 최대 종교도시 마슈하드다.
 
영화는 지난 2000년부터 있었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1년 동안 16명의 여성을 살해한 이는 '거미'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피해자는 죄다 거리의 창녀로, 범인의 공간에서 목이 졸려 살해됐다.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죽이듯이.
 
성스러운 거미 스틸컷

▲ 성스러운 거미 스틸컷 ⓒ 판씨네마(주)

 
칼을 들고 살인마를 뒤쫓는 기자
 
범행이 거듭되며 도시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진다. 여자들은 늦은 밤 밖을 나다니지 못한다. 남자들은 제 집의 여성들을 나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그럼에도 사건은 끊이지를 않는다. 마슈하드의 성지 앞에선 밤마다 200여명의 창녀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그중 누군가는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다.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는 여성기자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 분)와 살인마 거미(메흐디 바제스타니 분)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보수적인 이란 사회에서 온갖 편견을 뚫고 살인마를 쫓는 라히미의 이야기는 이란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내보인다. 미혼의 여성이란 사실만으로 호텔 예약이 취소되고, 온갖 사내들은 호시탐탐 그녀를 탐하려 든다. 잭나이프 하나를 늘 들고 다니지만, 그건 그녀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놀랍게도 거미는 평범한 가장이다. 순종적인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둔 사이드란 사내로,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한때 사이드는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 참전했었다. 수많은 이가 죽고 다친 그 전쟁에서 그는 용감히 싸웠으나 몸이 상하지 않고 돌아왔다. 순교자의 도시에서 태어나 순교하지도 다치지도 못하고 돌아와 희망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이 사이드를 괴롭게 한다.
 
성스러운 거미 스틸컷

▲ 성스러운 거미 스틸컷 ⓒ 판씨네마(주)

 
평범한 가장은 왜 여자들을 죽였나?
 
마침내 사이드가 선택한 건 살인이다. 성지를 더럽히는 부정한 여자들을 처단한다는 게 사이드의 목적이다. 재물을 빼앗지도 몸을 탐하지도 않는 숭고한 성전, 사이드는 그것이 순교하지 못한 저의 책무라고 믿는다.
 
영화는 흔한 스릴러가 되기를 거부한다. 처음부터 범인을 관객 앞에 까보이고 그의 보잘것없음을 블랙코미디적으로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뚱뚱한 창녀를 집으로 유인해서는 몸싸움을 벌여 뒤집히고 무기를 들지 말지를 고민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스릴러를 선택하지 않은 대신 영화는 캐릭터를 보다 가까이 들여보기를 선택한다. 그럼에 영화의 관심은 선명하다. 대체 왜 사이드는 그런 선택을 하는가, 이란 사회는 그 선택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성스러운 거미 스틸컷

▲ 성스러운 거미 스틸컷 ⓒ 판씨네마(주)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을 탄압하는 나라
 
이란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이른바 히잡시위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올해 한 달 만에 집행된 사형건수가 50건을 상회한다는 보고가 인권단체 이란휴먼라이츠(IHR)를 통해 발표됐을 정도다. 시작은 지난해 9월 테헤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뒤 의문사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으로 촉발됐다. 숨 쉴 자유도 허용치 않는 이란의 엄격한 종교통치에 대한 불만에 일시에 터져 나왔다. 이후 수많은 사형집행과 공권력에 의한 고문, 성폭력 등이 보고되며 국제사회에 공분을 일으켰다.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한지, 또 종교가 자행하는 억압이 인간을 어떻게 억누르는지, 그 야만적 폭력성은 얼마나 쉽게 대물림되고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살인범을 추적하는 기자 곁에서 함께 일을 겪어나가듯 그곳의 공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가 이란의 오늘을 그대로 겨냥한다. 이란 사회는, 그 수구적 체제는 그토록 변함없는 힘을 과시한다. 그 근간이 왜곡된 신앙이다.
 
지난해 제75회 칸 영화제는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살인마 사이드를 연기한 메흐디 바제스타니는 제33회 스톡홀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들의 혼이 깃든 연기로 빚은 영화가 바로 <성스러운 거미>다. 이들이 전하려 했던 건 분명하다. 세상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 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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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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