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 SBS

 
드라마 <트롤리>는 한 정치인의 몰락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는 자신의 성폭력이 알려지자 자살로 자신의 과오를 덮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탄식(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많은 대의를 성취했을 거라는) 속에 애도되었다. 반면 단지 그의 성폭력 사실을 알리고 마땅한 사과와 처분을 바랐던 성폭력 피해자는 일상을 이어갈 수 없는 가혹한 2차 피해를 겪어야 했다. 드라마를 보며 그때 그 사건을 아프게 떠올린 시청자는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주지하듯 '트롤리 딜레마'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느냐 마느냐의 어려운 선택을 이른다. <트롤리>는 바로 이 딜레마를 차용해 시청자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트롤리 딜레마의 적절성에 의문이 든다. 사회가 정치인 성폭력 범죄를 바라보는 시선에 과연, 대의냐 아니냐라는 딜레마에 봉착한 적이 있기는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의 성폭력을 바라보는 불편함의 핵심은 그들이 해온 대의나 공적을 나름 따져보자는 공정함 때문에 있기보다(이도 부정의 하지만), '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저런 사소한 '여자문제'로 좌초시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남성권력에 대한 관대함에 있기 때문이다. 해서 드라마가 시청자를 고민에 빠뜨리려는 '트롤리 딜레마'가 실은 실체가 없는 위장된 진실게임인 것은 아닐지 회의스럽다.
 
중도가 말하는 '더 좋은 세상'에 피해자 자리는?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 SBS

 
드라마가 고민을 던지는 트롤리 딜레마의 당사자인 주인공 중도(박희순)는 정의로워 보이는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욕심이 없으면 이 자리에 있겠"느냐는 시인처럼, 그 역시 여느 정치인처럼 야망이 크다. 그의 야망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나아가지만, 실은 그 혜택을 누릴 시민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좋은 세상의 핵심 권력을 움켜쥘 자신에 있다. 야망에 취해 어느새 과정의 정의로움 따위가 번거로워진 그는 성폭행을 저지르고도 이를 무마시키고, 가당치 않게도 성폭행 관련 법을 만들어 더 많은 피해자를 구제하겠다고 나선다.
 
정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건 믿었던 남편의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된 혜주(김현주)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의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성폭력 피해 당사자다. 성폭력을 당한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만 가해자가 어이없게도 자살하고 만다. 가해자가 서울대 합격생이라는 사실은 혜주를 일순간에 꽃뱀으로 전락시킨다. 재력이나 학력 앞에 무릎 꿇는 세간의 평은 부유한 명문대 남자 합격생에겐 저절로 무죄의 자리를, 가난한 고아 여자 피해자에겐 무고죄의 자리를 배정한다. 게다 가해자 사망으로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법의 논리는 그를 더욱더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결국 자살로 최악의 가해를 가한 가해자는 안타까운 죽음으로 애도되고, 피해자인 혜주는 가난한 꿈마저 빼앗긴 채 불명예를 안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런 혜주를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가 그런 아픔을 겪고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성폭력 피해자는 불행할 거란 낙인을 지우며 인간의 존엄을 되새기게 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고통은 다시 찾아들고 그토록 믿었던 남편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게다 남편의 성폭행 피해자가 다른 이도 아닌 혜주가 그토록 믿고 사랑하는 여진(서정연)이라는 충격은 그를 좌절시킨다.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 SBS


혜주와 여진은 피를 나눈 자매는 아니다. 하지만 한집에서 오순도순 살아간다. 그들이 어떻게 그토록 서로를 믿고 아끼는 자매가 되었는지 드라마는 소상히 다루지 않지만, 이들의 자매애는 타인끼리도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소중히 일깨운다. 사랑도 신뢰도 없이 단지 혈연으로 맺어졌다는 이유로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가족보다, 서로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만큼의 품에 기대고 의지하는 타인 간의 결연이 더 가치 있고 단단할 수 있다. 혜주와 여진의 가족됨은 이런 관계가 바로 가족다움이라고 힘 있게 설득해낸다. 이토록 소중한 가족이 또 한 사람의 가족인 남편에게 성폭행 당했다. 혜주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혜주는 여진의 성폭행 진실 앞에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잊고 싶었고 그래서 숨어살다시피 했던 자신의 고통을 다시 꺼내들게 된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피해를 떠올리자, 그때 그 순간의 참혹했던 여자아이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고통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진이라고 다르겠는가. 중도에게 성폭행 당하고 5년 동안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가해자와 한집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야 했던 처참한 그는 곧 자신이지 않은가. 혜주는 사무치는 회한과 함께 자신이 누구 편에 서는 것이 인간다운 선택인지 깨닫는다. 혜주와 여진은 이제 우리의 싸움을 시작한다.
 
죄의 공모가 가족애라고 믿는 어리석음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SBS 드라마 <트롤리>의 한 장면. ⓒ SBS

 
혜주와 여진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과 달리, 혜주의 소녀 시절 절친 승희(류현경)는 가족이라는 무조건적인 범주 앞에 허무하게 붕괴되는 우정으로 대비된다. 승희 일가는 지역의 알아주는 부자이며, 혜주를 성추행한 가해자가 바로 승희 오빠다. 승희와 혜주가 어떻게 절친이 되었는지 드라마는 자세히 그리지 않지만, 승희는 혜주가 보육원에서 살고 있는 처지임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조금만 세심한 우정을 견지했다면, 혜주가 어떤 지원도 없이 보육원을 나와 독립해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에 다녀야 하는 신산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과, 게다 성폭력이라는 가공할 폭력 앞에 얼마나 위태로운 지형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지를 알 수 있어야 했다.

둘 중 한 사람이 거짓이라면, 오빠를 죄 없음으로 추정하는 것처럼, 혜주 역시 그 자리에 한 번은 공평하게 놓아 주고 살펴보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승희는 그러지 않았다. 한 번도 혜주의 입장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가 "믿어야지. 가족은 그런 거야"라며 오빠에게 향하는 무조건적인 맹신은 과연 가족에 대한 소중함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남녀 성별 권력과 계급 등의 차이가 인간을, 여성을, 어떤 곤경으로 몰고 가는지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도 되는 부유한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태만함 때문은 아닐까?
 
한 정치인의 아내는 가해자가 자신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해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했다. 하지만 드라마 속 혜주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20년 전 자신이 당한 성폭력과 남편의 성폭행 가해를 증언함으로써 피해자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용감히 보여주었다. 드러난 범죄 앞에 고작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수치를 덮으려는 남편에게 "왜 죽어. 살면서 벌 받아"라고 단호히 호통친다. 성폭력 앞에 무조건 가족의 편에 서는 것을 이 시대 가족애로 승인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가 끝까지 밀고 왔던 화두는 트롤리의 딜레마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허상과 가장된 정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구조되지 못한 참상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트롤리 트롤리의 딜레마 성폭력 가족주의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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