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와 오판으로 시대를 역행하려했던 축구협회(KFA)의 반란이 팬들의 저지로 불과 3일만에 진압당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또다시 팬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죄해야했다.

하지만 단지 사죄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진상 규명과 개혁이라는 또다른 과제의 시작일뿐이다.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축구협회 이사회는 지난 3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축구회관에서 임시 이사회를 열고 3일전인 지난 28일 이사회에서 의결했던 '징계 사면건'을 전면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협회는 각종 비위 행위로 징계를 받은 전현직 선수, 지도자, 심판, 단체 임원 등, 축구인 100명에 내린 사면 조치를 결의한바 있다. 협회는 그 명분으로 지난해 달성한 월드컵 10회 연속 진출과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에 대한 자축, 오랜 기간 자숙하며 충분히 반성을 했다고 판단되는 축구인들에게 재기의 기회 부여, 축구계의 화합과 새 출발을 위해 일선 현장의 의견을 반영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국민적 관심이 모아지는 우루과이와 평가전을 불과 1시간 앞둔 시점에 나온 발표였다.
 
하지만 한국 축구에 오점을 남긴 인물들을 굳이 사면해야 하는 이유도 석연치 않은 데다, 민감한 사안임에도 충분한 여론 수렴이나 논의 과정 없이 기습적으로 사면을 결정한 것에 팬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또한 사면 대상에는 한국축구의 가장 치욕적인 흑역사인 '2011년 프로축구 승부조작 파동'에 가담했다가 제명된 선수 48명도 포함돼 있었다. 축협의 결정은 명분의 공정성, 절차의 투명성 등이 모두 도마에 오르며 꼼수와 날치기라는 거센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같은 축구계는 물론이고 체육계의 반응도 회의적이었다. 승부조작 파동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한국프로축구연맹(K리그)에서는 "우리는 사면하지도, 사면할 계획도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축구협회의 독단적인 결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상위 기구인 대한체육회는 "징계 기록을 삭제하는 규정이 없어 사면은 불가능하다. 관련된 문의를 받은 적도 없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축구협회는 더욱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몰렸다.
 
또한 축구대표팀 공식 응원단 붉은악마는 SNS에서 성명을 내고 "기습적으로 의결한 사면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전면 철회를 요구한다"고 발표하며 "공든 탑을 쌓는 마음으로 조금씩 성장하던 K리그와 한국 축구였는데 협회 수뇌부가 12년간 모두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리그 경기 보이콧·항의 집회 등 모든 방안을 동원해 행동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축구회관 앞에선 축구 팬의 '1인 시위'가 이어지기도 했다. 일부 국가대표 출신 유명 축구인들도 SNS와 온라인 등을 통하여 협회 비판에 가세하며 여론은 악화일로였다.
 
빗발치는 질타에 당황한 협회는 결국 3일만에 다시 임시 이사회를 열고 사면 조치를 백지화했다. 이사회 후 정 회장은 입장문에서 "승부조작이 스포츠의 근본 정신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라는 점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라면서도 "그들이 저지른 행동이 너무나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것 또한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한 우리 축구계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라고 늘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정 회장은 "2년여 전부터 "10년 이상 오랜 세월동안 그들이 충분히 반성을 했고, 죄값을 어느 정도는 치렀으니 이제는 관용을 베푸는 게 어떻겠느냐"는 일선 축구인들의 건의를 계속 받았다"며 "다시 한 번 한국 축구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한국 축구의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소임이라고 여겼다"고 사면 배경을 해명했다.
 
이어 그는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했다. "승부조작 사건으로 인해 축구인과 팬들이 받았던 그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다. 한층 엄격해진 도덕 기준과 함께, 공명정대한 그라운드를 바라는 팬들의 높아진 눈높이도 감안하지 못했다"라며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와 사전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이번 사면 결정 과정에서 저의 미흡했던 점에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면 철회만으로 무마하기에는 이미 사태가 너무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체육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사면안을 제안하고 의결한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협회 이사회가 축구 팬에게 사과하고,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요구한다"고 규탄하기도 했다.
 
축구협회는 이번 사면 해프닝으로 도덕성과 사회적 공감대라는 측면에서 치명타를 입었다. 그 배경이 체육계 특유의 제 식구 감싸기와 온정주의든, 혹은 다른 목적이 있었던지 간에 왜 이런 말도 안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지 명확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사면 불발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한 부분은 하나둘이 아니다. 축구팬들은 사면 대상 100인을 선정한 기준과 명분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 협회는 왜 굳이 승부 조작범을 사면해야했는지도, 그외 52인의 명단과 죄상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누군가 이 사면안을 최초로 건의한 이들이 있을 것이고, 주동자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이 벌였는지 밝혀야한다. 또한 이러한 졸속 사면안이 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통과할 동안, 이사회가 토론이나 견제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못했다는 것, 정몽규 회장이 왜 그런 건의를 받아들였는지, 그 과정도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이다.

실제로 사면 결정 당일 그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이사회에 참석한 이들도 다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머릿수만 채우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사회라면 거수와 다를게 없다.
 
또한 축구협회는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지만 사실 그 사과마저도 불통과 졸속이었다. 긴급 소집된 이사회는 비공개로 진행됐고, 정 회장도 사과문만 발표하고 취재진의 질의는 회피했다. 어떻게든 사안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어하는데만 급급한 눈치였다.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없다면 이런 사고는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 어쩌면 이번 사건이 남긴 진정한 의의는, 축구협회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당위성만 더욱 분명하게 각인시켰다는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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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규사과 승부조작 사면안 축협 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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