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라고 해서 왔는데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아니고요. 영화제 프로그래머라고 합니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
 
그답게 엉뚱한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참석한 백현진이 28일 오후 전주시 완산구 내 한 호텔에서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최근 드라마 <모범택시> <악마판사>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영화 <브로커> 등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그이지만 배우이기 전에 미술 작가이자 음악인으로 25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다.
 
그런 그가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J스폐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섹션을 담당하게 된 것. 전주국제영화제가 지난 2021년부터 마련한 해당 섹션은 그간 배우 류현경, 연상호 감독이 참여했고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다. 백현진은 본인의 추천작으로 스페인 거장 루이스 부뉴엘 감독 영화 세 편과 본인 출연작 및 연출작 5편을 선정, 총 7편의 영화로 관객들과 만난다.
 
 28일 오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베스트웨스턴 플러스 전주 호텔에서 열린 'J 스페셜 :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배우 백현진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8일 오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베스트웨스턴 플러스 전주 호텔에서 열린 'J 스페셜 :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배우 백현진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뜻밖의 만남
 
백현진은 밴드 어어부프로젝트 및 솔로 활동을 하던 때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전주에서 공연하고 놀던 기억부터 꺼냈다. "한국에 여러 영화제들이 있는데 가장 놀기 좋은 곳이 전주였다. 지역 특성일 텐데 많은 맛집들, 골목들이 일종의 지역 유산일 것"이라며 "제겐 전주가 소소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올해는 또 지내봐야 알겠지만 예전에 전주는 친밀하고 사적인 느낌이 있었다"고 말했다.
 
부뉴엘 감독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을 선정한 것에 그는 "좋아하는 영화 세 편, 출연작 두 편을 고르면 된다는 말에 마치 테트리스 게임에서 우연히 판을 맞춰버리는 느낌처럼 딱 떠오른 게 부뉴엘 감독 영화들이었다"며 "20대에 비디오로 본 영화도 있고, 세 편 중 한 편은 극장에서 볼 수 없었기에 상영조건이 맞는다면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본인 출연작인 장률 감독의 <경주>(2014), 김지현 감독의 <뽀삐>(2002)를 택한 이유로 "왠지 홍상수 감독님처럼 제가 참여한 영화 중 이름이 크신 분 말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관객들과 함께 보고픈 영화로 정했다"고 답했다.

그는 "제가 배우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한 지가 채 2, 3년이 안 된다. <경주> 때도 그랬는데 제가 감독님의 중국 영화를 좋아해서 박해일씨와 같이 만났고 죽이 맞아 참여하게 됐다"며 "<뽀삐>는 굉장히 인상적 단편을 만들던 분의 장편 영화인데 제겐 장편 영화에서 처음 주연을 해본 작품"이라 말했다. 더불어 <뽀삐>라는 작품의 길이가 70분 가량이기에 미술 작가로 활동하는 모습을 반영한 <디 엔드>(2009) <영원한 농담>(2011)를 함께 묶어 소개하게 됐다는 사실도 전했다.

작가이자 음악인, 배우라는 여러 정체성을 가진 것에 백현진은 "호기심이 가고 그런 게 아니면 다른 일을 잘 안하는데 배우 쪽으론 열려 있었다. 하지만 오디션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남에게 평가받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라며 "4수를 해서 어렵게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지만 가자마자 못 다닐 것 같아 그만두게 됐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어 그는 "고등학교 때까진 평범한 학생처럼 살다가 문예창작과를 지원해서 낙방하기도 했고, 이후 15년 정도를 청년 예술가로 살며 늘 불안해하기도 했다. 서른 중반부터 운이 좋았던 것 같다"며 "회사는 다니기 싫었고, <씨네21>에서 3년간 일러스트레이터로 한 달에 40만 원 벌며 살았는데 얼마나 생활이 불안했겠나. 지금은 전혀 안 그렇다. 운전도 안 하고, 주식도, 코인도, 부동산도 안 하고 그해 번 돈 그해 다 쓰고 전세-월에 살고 있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재치 있게 부연했다.

연기자 정체성을 인식하다
 
배우, 특히 악역을 최근에 많이 했다는 질문에 그는 "그런 역할로 알려져서 빌런 끝판왕이라고들 하시는데 오랜 지인들은 의외라고 생각한다"며 "국민학교 3학년 때 오청준이라는 친구랑 주먹 싸움을 했다가 진 게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화를 남에게 내진 않지만 자라면서 내면에 분노가 많은 청년이긴 했다. 한남, 권위 이런 거 진짜 싫어해서 (연기로) 표현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모범택시> 제 캐릭터가 양진호라는 사람이 모델이더라. 뉴스도 안 보는데 굉장히 나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그 사람을 검색했는데 직원을 때리는 게 나와서 제대로 못 보겠더라. 그냥 감독님께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했는데 찰떡 캐스팅이라는 반응이 나오더라."
 
스스로 배우 정체성을 인정하기로 한 분기점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출연 직후였다고 한다. 해당 작품 이후 드라마와 여러 영화에서 제안이 많이 몰리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는 "이 정도로 일을 많이 하게 됐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인정하자는 생각이다. 몸에 익숙해지도록 붙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입장에선 연기하는 모습이 일반인처럼 보인다는 게 고마운 반응이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번에 공개한 두 작품 외에 한 작품을 더 만들어 <하루 끝의 끝>이라는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그는 "생물학적 나이가 이젠 문상 횟수와 함께 늘어가잖나. 죽음과 이별에 관련한 무엇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이라 설명을 더했다.
 
또한 그는 "제가 산만하고 호기심이 많은데 뭘 잘 안 하려 한다. 깔끔하게 예술가로 살다가 죽어야지 할 정도로 구체적 계획이 없다"며 "뭘 안 하려다 보니 하는 게 많아지는 듯하다. 호기심이 생기면 이것저것 하니까. 다만 운이 좋았다. 하기 싫은 거 안하고 여러 일을 하며 운 좋게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끝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바라는 점을 묻는 말에 백현진은 "제 입장에선 너무 거창한 주제인데 가볍게 대중과 만나는 것보다 때론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도전을 용감하게 해주길 바란다"라며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게 어렵겠지만 그렇게 해주길 전주 뿐 아닌 모든 영화제에 바란다"고 답했다.
백현진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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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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