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1 14:59최종 업데이트 23.07.0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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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 ⓒ Johannes Vermeer

 
따스한 햇살이 스며든 부엌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우유를 따르고 있는 여인을 그린 그림. 17세기 황금기 네덜란드가 낳은 대표적인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는 일상적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그림이다. 이와 같은 그림을 장르화(genre painting)라고 하는데, 우리식으로 이해하면 조선 후기 풍속화에 해당한다.

장르화는 일상 생활의 단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에 당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 역할을 한다. 페르메이르는 일평생 네덜란드 중서부의 작은 도시 델프트에서 보냈다는 사실 이외에 알려진 바가 없어 그의 작품은 그의 인생과 시대를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우유 따르는 하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시대상은 무엇일까?

성모마리아 말고 하녀를 그리다

<우유 따르는 하녀>에서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은 파란색 안료의 사용이다. 하녀의 앞치마, 테이블 보, 테이블 위의 청자와 행주, 델프트 타일(Delft tile)로 만든 굽도리까지 화면 하단부에 넓게 퍼져있는 파란색은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차분하고 경건하게 만든다.

특히 하녀의 앞치마에는 파란색 안료 중에서도 울트라마린 블루가 사용되었다. 울트라마린 블루는 멀리 바다 건너 아프가니스탄에서 채굴한 청금석으로만 만들 수 있어 황금보다 비쌌다. 그래서 중세시대부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는 데에만 쓰였다. 그런데 페르메이르는 그저 부엌일을 하는 하녀에게 이 귀한 파란색을 쓴 것이다. 공주도 아닌 미천한 신분의 하녀의 옷자락에 어떻게 울트라마린 블루를 칠할 수 있었을까?
 

울트라마린과 페이메르 그림의 일부(왼쪽)

 
그 배경에는 16세기에서부터 17세기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지속된 종교전쟁이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결 구도 속에서 페르메이르의 도시 델프트를 포함한 네덜란드 북부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회복을 주장한 개신교의 영향권에 있었다. 가톨릭은 장대하고 화려한 성화(聖化)와 성상 제작에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는 이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철저히 배격했다.

이에 따라 일자리를 잃어버린 예술가들은 교회 대신 가정집을 장식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장르화, 풍경화, 정물화 등을 제작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장르의 그림들은 언뜻 종교와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엄격한 도덕과 윤리의식을 요구한 개신교의 개혁정신이 자리한다. 성서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일상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헤라드 혼소르스트의 <벼룩 사냥>(1621) ⓒ 헤라드 혼소르스트

 

마찬가지로 페르메이르가 그린 하녀의 일상에는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범적 삶에 대한 찬미가 녹아있다. 그리스도교에서 풍요를 의미하는 우유를 조심스럽게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절제와 절약의 미덕이 몸에 밴 모습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게으르고 부도덕한 존재로 그려지던 하녀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우유 따르는 하녀> 속 또 다른 특징적 파란색인 델프트 타일은 페르메이르의 시대가 요구한 모범적 여성상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델프트 타일은 16세기 말 동방의 푸른 빛에 매료된 유럽인들의 욕망이 낳은 산물이다. 바닷길을 통해 동서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청화백자를 접하게 된 유럽인들은 어떻게 하면 이토록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신비롭게 빛나는 파란색 그림을 덧입힐 수 있는지 그 제작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진열장에 전시된 델프트 도기들. ⓒ Kim Traynor

 
이때 가장 먼저 근사치에 도달한 이들이 페르메이르의 도시 델프트의 도공들이었다. 이들은 백색 주석 유약으로 하얀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코발트블루 안료를 입혀 청화백자를 모방한 '델프트 도기(Delftware)'를 개발했다. 델프트 도기는 청화백자와 동일한 내구성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파란색 무늬만큼은 거의 흡사했다.

게다가 훨씬 경제적인 제작 비용 덕분에 델프트 도기는 단숨에 유럽 최고의 수출상품으로 부상했다. 너무 귀해서 고이 모셔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관상용 예술품이 아니라 그릇, 타일, 화병 등 생활도자로 만들어진 덕분에 폭 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타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태양왕 루이 14세는 델프트 타일로 실내외를 장식한 별궁 '트리아농 데 포셀라인(Trianon de Porcelaine)'을 지었을 정도였다.


델프트 도기의 원산지인 델프트에서도 타일 소비량이 가장 많았다. 페르메이르와 동시대에 활동한 장르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피터 데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의 그림을 보면 굽도리, 벽난로 주변, 계단 등을 장식한 델프트 타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모두 생활 흠집이 많이 생겨 청결을 유지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델프트 타일과 여성성

특히 벽난로 주변은 불을 피우면 생기는 그을음을 쉽게 닦아낼 수 있어 타일 만한 마감재가 없었다. 더욱이 델프트 타일은 흙을 저온에서 구워내는 경질도기(earthenware)이기 때문에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한 수축과 팽창도 거뜬히 견뎌 낼 뿐더러 청아한 파란색 손그림으로 장식적인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 일석삼조의 재료가 되었다.

<우유 따르는 하녀>에서 페르메이르는 델프트 타일에 사랑의 신인 큐피드를 그려넣었다. 이 큐피드는 발난로를 향해 화살을 당기는 모습이다. 네덜란드처럼 냉기 가득한 저지대에서 발난로는 겨우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여성들은 보통 치맛단 속에 넣어 아랫도리를 따뜻하게 데우는 데 사용했다. 이런 연유에서 발난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은유하는 상징물로 통한다. 그런데 페르메이르의 하녀는 우유를 다루는 서늘한 부엌에서 발난로를 등지고 서 있다. 큐피드가 쏘는 사랑의 화살을 외면한 채 가사일에 전념하는 그녀는 스스로 절제하고 인내하는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피터 데 호흐의 <젖먹이는 여인> ⓒ Pieter de Hooch

 
흥미롭게도 피터 데 호흐의 작품에서도 델프트 타일은 여성성과 결부된다. 그의 작품 속 공간은 모두 집안이며, 집안은 모두 아이를 양육하고 살림을 꾸리는 여성의 공간으로 그려졌다. 이는 네덜란드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적 가정의 모습이었다. 17세기 중엽 세계 최대 무역국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약 한 세기 먼저 근대 시민사회 개념을 확립했다. 이때 가정은 여성의 영역이며, 여성의 미덕은 가정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자녀를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양육하는 것이었다. 페르메이르의 네덜란드에서 장르화에 등장하는 여성들 대다수가 집안에서 가사를 돌보는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가 이러한 맥락에 있다.

페르메이르가 활동했던 시기 네덜란드는 세계 해상 무역을 장악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그런데 역사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인 튤립 투기 광풍이 몰아친 것도 이 때다. 인간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사건이 철저한 금욕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우유 따르는 하녀> 또한 델프트가 도기 생산과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단출한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인을 그린, 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이 오늘날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품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진정한 삶의 가치란 허황된 풍요가 아닌 절제의 미덕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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