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내)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어디일까? 바로 집이다. 이 위험천만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두 여자의 이야기가 스릴러로 그려졌다. 11일 종용한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이다.
 
너른 잔디 마당이 있는 고급 주택에 사는 주란(김태희 분)은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유능한 남편, 똑똑한 아들, 윤택한 가정은 누구나의 워너비다. 그런데 마땅히 행복해야 할 주란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불안정하다. 이 집의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사악한 남편, 불안정한 아내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한 장면.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한 장면. ⓒ ENA

 
주란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의 불안정한 심리는 여기서 태동했겠지만, 그의 증상이 "하나도 낫고 있지 않은" 데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분명히 맡은 냄새나 분명히 들은 소리 등 명백한 감각을 부정당하며 살아간다면, 누구라도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된다. 가스라이팅의 위력이다. 주란의 긴 머리를 빗겨주며 주술을 거는 사악한 자는 바로 그의 남편 재호(김성오 분)다.
 
재호는 주란의 불안을 이용해 그의 감각을 조종한다. 악취와 소음과 목격한 것을 부정하고 주란이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믿게 만든다. 심리적 착각으로 오도시켜 정신과 약을 먹이고 유순하게 길들인다. 집 밖은 위험하며 '너를 보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맹신하게 한다. 최면을 걸듯 주란을 미혹시켜 조종하며 살아왔다. 이런 이들 부부 앞에 어느 날 상은(임지연 분)이 나타난다. 상은은 즉각 주란의 삶이 망가져 있음을 그리고 고장 낸 자가 바로 재호 임을 직감한다. 당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동물적 촉수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주란이 위험하다고.
 
물론 상은은 주란을 구제하러 나타난 천사가 아니다. 죽은 남편 윤범(최재림 분)이 재호에게 하려던 일(5억을 받아내기)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윤범이 집 전세 보증금까지 날리고 죽자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살아갈 길이 막막한 상은으로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윤범을 제거하고 겨우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아이와 함께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상은은 아내 폭력(나는 가정폭력이라는 모호한 용어에 반대한다) 피해자다. 동네가 다 알게 맞고 살지만 무엇도 누구도 상은의 피해를 구제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이 아니라 명백한 아내 폭력이지만, 뼈가 으스러지고 죽어 나가도 사적인 영역의 집안일인 것이다. 죽을 때까지 맞아도 누구에게도 구출될 수 없음을 깨달은 상은은 중대 결단을 내린다. 죽느냐 사느냐다. 죽을 결심까지 했지만 사실은 "살고 싶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 분)가 갖은 방법으로 학대하는 남편을 죽여야만 살 길을 낼 수 있었듯, 드라마 <더 글로리>의 현남(염혜란 분)이 죽도록 구타하는 남편을 없애야만 딸과 살아갈 일을 도모할 수 있었듯, 상은 역시 그랬다. 남편을 죽인 게 탄로 난 사건들에 여론이 사납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경우엔 놀라울 만큼 잠잠하다. 낯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통쾌한 복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구현되는 카타르시스일뿐, 현실에서는 평생 맞다 죽는 경우가 많다. 평화연구자 정희진은 이를 '학습된 희망'이라 불렀다. 폭력에 찌들어 사는 여자가 집을 탈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남편이 개과천선 하리라는 '학습된 희망'을 놓지 못해서다. 사회적 가스라이팅이 아내를 집 안에 결박시킨 것이다. 때리는 남자들은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심리적 불능을 뚫고 남편을 죽여서라고 살아남겠다는 아내의 생존본능은 눈물겹지만 현실 불가능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헤어지면 되지 죽일 것 까진 없잖아. 그렇지 않다. 이는 남자들에게만 유효한 대안이다. 어떤 여자들은 애인이나 동거남, 남편과 헤어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안전한 이별이 불가능한 이유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한 장면.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한 장면. ⓒ ENA

 
한국여성의전화가 2022년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여성은 1.17일에 1명 꼴이다. 이런 현실의 통계는 안전한 이별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증명한다. 

전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아내 폭력을 "전염병 수준의 전 세계적인 보건 문제"라고 통감했듯, 아내 폭력 등 친밀한 폭력은 명백히 사회적 공조가 필요한 '공중 보건의 문제'지만, 그 심각성이나 해결 방안은 전혀 사회적 의제가 되지 못한다. 서래와 현남 그리고 상은이 남편을 죽이는 외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없었던 이유다. 이런 까닭으로 여자들의 선택에 기계적 윤리만을 개입시키는 판단은 부정의하다.
 
드라마에서 비치듯 주란과 상은은 계급이 다르다. 서걱거린다. 상류층 주란은 우아하고 하류층 상은은 거칠다. 살아온 계급은 그 사람을 설명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부유한 결혼생활이 가스라이팅으로 점철되었고 근사한 쇼윈도 부부가 자아를 희생한 대가였음을 깨달은 주란은 자신의 계급이 무용하다. 마당 있는 집에 둘러쳐진 남편의 보호라는 보이지 않는 철옹성은 돈(계급)이 아니라 생존하려는 동물적 투지만이 깨부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력자는 당연히 남편의 폭력을 겪고 살아남은 상은이어야 했다.
 
주란은 남편의 기만과 범죄를 눈치채고 상은에게 공조를 요청한다. 3억이라는 프리미엄을 얹어 공조를 제안하지만 상은은 망설인다. 어쩌다 남편을 죽이긴 했지만 감정의 동요 없이 사람을 죽이는 전문 킬러는 아니지 않은가. 게다 살인 공조가 발각되면 겨우 벗어난 지옥에 다시 떨어질 것이 자명하다.
 
계급을 떠난 여성연대에 관한 좋은 예시는 오래된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이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돌로레스는 남편이 딸애까지 성추행한 것을 알아챈 후 도망치려 하지만, 남편이 모아둔 돈마저 훔쳐 탕진했음을 알고 절망한다. 이때 돌로레스가 가정부로 일하고 있던 저택주인 베라는 돌로레스에게, 세상의 모든 사고가 우연이지 않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때로 악녀가 되는 것이 살아남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돌로레스와 베라는 평생 하녀와 주인이라는 계급을 타파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서로의 비밀을 지켰다. 계급이 다르다고 가부장 폭력이 다르게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에 연대한 것이다. 이거면 충분하다. 끈끈하게 지속되는 우정이 아니면 무슨 상관인가.

상은과 주란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서로를 구했다. 서로를 살린 연대자, 이거로 족하다. 어떤 여자들에겐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악한 지배자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제 주란과 상은의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마당이 있는 집> 김태리 임지연 아내 폭력 가스라이팅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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