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뒤 결과 나오는데... 90% 투표하는 신기한 나라

[정치신대륙을 찾아서③] 사표 걱정 없는 호주 유권자들, 선거일 최대 관심은 '핫도그 맛집'

대결을 넘어 전쟁으로 치닫는 한국 정치는 어떻게 해야 달라질까요? <오마이뉴스>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국민투표로 선거제도를 바꾼 뉴질랜드, 선호투표제로 사표를 막는 호주 두 '정치신대륙' 탐방에 나섰습니다. [편집자말]

호주 선호투표제는 유권자가 단 1명의 후보에게만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출마한 후보 전원에게 지지하는 순서대로 순위를 매개 투표하는 선거제도이다. 1순위 후보자가 과반득표를 못했을 경우 최저 후보자를 탈락시킨 뒤, 최저 후보자의 2순위 표를 후보자들에게 다시 나눠 주는 식으로 개표를 진행한다. 이후 과반득표가 나오면 당선이 결정된다. ⓒ 호주 선거관리위원회(AEC) 제공

앞으로 8개월 정도 뒤면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다. 만약 2024년 4월 10일 투표한 결과가 5월 10일에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투표 당일, 늦어도 다음날 새벽이면 결과가 나오던 '빨리빨리'의 나라 대한민국 국민들은 불만 없이 기다릴 수 있을까.

반면 선거일로부터 최대 41일 안에 개표 결과가 정리되는 나라가 있다. 호주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의가 제기되면 다시 검표를 진행한다. 이 기간 등을 거쳐 총선이 완전히 끝나는 공식마감일(Return of Writs)에 이르기까지는 길면 선거일 이후 77일까지 걸린다. 물론 투표 당일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는 보통 1~2개월 소요됐다. 아무튼 한국과는 속도가 확연히 다르다. 지루하고 답답하지 않을까.

"우리의 모토는 '급하지 않게, 정확하게'입니다(Our moto is 'right not rush')."

앞선 질문에 호주선거관리위원회(Australian Electoral Commission, AEC) 팻 캘러넌(Pat Callanan) 선임소통담당관이 내놓은 답이다. 7월 6일 호주 수도 캔버라 AEC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난 그는 "다행히도 우리에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지루하지 않게) 매일 저녁 TV에서 투표 현황을 분석해주는 정치평론가들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호주에선 긴 개표 시간을 용인할 뿐 아니라 오래 걸리더라도 의혹이 없을 때까지 검표해야 "모두가 공정하게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였다.

급하지 않게, 정확하게... "모든 목소리를 전달"


팻 캘러넌 호주 선거관리위원회(AEC) 선임소통담당관 ⓒ 유성호

호주가 개표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1918년 연방총선부터 실시한 '선호투표제(Preferential voting)'라는 독특한 선거제도에 있다. 내각제인 호주는 6개 주마다 12석, 준주 2곳은 2석씩 동등하게 의석을 갖는 상원, 총 151개 지역마다 1명씩 대표가 있는 하원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된다. 상원과 하원은 각각 유권자가 모든 후보에게 자신의 선호도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의원을 선출한다. 다만 투표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




한국의 지역구 국회의원과 비슷한 하원의 경우 유권자는 선거에서 모든 후보자에게 자신의 선호도를 전달해야 한다. 후보가 10명이라면 가장 선호하는 후보에게 1번, 그 다음 2번, 3번 순으로 10번까지 모두 표기하는 방식이다. 당선자는 '50%+1표'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1차 개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다면? 최하위 후보가 탈락하되 그를 1순위로 택한 유권자의 표 중 2순위에 해당하는 표를 다른 후보들에게 배분한다. 이렇게 개표와 탈락을 반복해 당선자가 정해진다.

상원 선거는 또 다르다. 호주 유권자들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뉜 투표용지를 받는데, 정당에 투표하거나(선 상단 투표 above the line), 또는 후보에 투표(선 하단 투표 below the line)를 할 수 있다. 정당 투표는 최소 6위까지, 후보투표는 최소 12위까지 표시해야 한다. 계산법도 다르다. 총 유효표를 선출할 의원 숫자에 1을 더한 수로 나눈 다음 그 결과에 한 표를 더 얻어야 당선이다. 이때도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선호도를 계속 배분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 하나, 호주는 연필로 투표한다. 또 반드시 AEC가 투표소에 비치하는 연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유권자가 개인 필기구를 사용해도 괜찮다. 하지만 기온이 높은 지방에선 펜의 잉크가 번지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선관위가 공식 제공하는 기표도구는 연필뿐이다. 물론 개표는 투표용지를 스캔하면 컴퓨터가 표시된 선호도를 인식해 계산하는 방식이다.

한국인의 눈에는 마냥 느리고 답답해보이는 선거제도에 호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표'가 발생하지 않아서다. 한국처럼 상대 후보보다 단 한 표만 더 받아도 승리하는 단순다수대표제는 다른 후보를 찍은 유권자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반면 호주는 가장 선호하는 후보가 탈락해도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모든 투표의 효력이 유지된다. 자신의 표를 사표로 만들지 않기 위해 '덜 선호하는' 후보에게 표를 줄 필요가 없는 셈이다.

캘러넌 선임담당관은 "당신의 '목소리'는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전달된다"며 "기표소에 들어가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투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은 민주주의에 정말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동석한 밀리 드류(Millie Drew) 공보담당관도 "우리는 유권자의 모든 선호도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주에서도 당신의 표가 버려지지 않는다"며 "사람들은 모든 의견이 반영된 것처럼 느낀다"고 덧붙였다.
1 1 1 1 1 1 1 1 1 1 2 2 2 2 2 2 2 2 2 2 3 3 3 3 3 3 3 3 3 3 4 4 4 4 4 4 4 4 4 4 1 3 4 6 4 2 0 0 1 1 1 1 1 1 1 1 1 1 2 2 2 2 2 2 2 2 2 2 3 3 3 3 3 3 3 3 3 3 4 4 4 4 4 4 4 4 4 4

음식메뉴 정하기로 선호투표제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0명이  치킨 ,  햄버거 ,  피자 ,  도넛  4가지 음식 모두를 먹고 싶은 순으로 투표해서, '50% + 1표 이상'을 득표하는 메뉴 한가지로 통일해 먹게 됩니다.

 치킨 3표 ,  햄버거 4표 ,  피자 2표 ,  도넛 1표 입니다.

햄버거가 가장 많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합니다.
4명이 가장 좋아한다고 해서  햄버거로 통일 한다면, 6명은 원치 않아도 햄버거를 먹어야 합니다. 현재 '한국 투표제도' 방식입니다.

'선호투표'로 하면 꼴등이 두번째로 좋아하는 음식으로 다시 득표 계산을 합니다.
4위를 한  '도넛' 의 2순위는  '치킨' . 치킨 1표를 더하면 햄버거와 치킨이 4표로 동률이 됩니다. '50% + 1표 이상'인 메뉴가 없으므로, 3위 메뉴로 넘어갑니다.

3위를 한 피자 2표 의 2순위는 치킨. 2표를 치킨에 합산하면, 치킨 6표 ,  햄버거 4표 치킨이 1위 가 됩니다.

선호투표로 하면  '도넛의 사퇴' 도,  '치킨-피자 연합' 도 필요없습니다.
선호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음식으로 정하는 것, 원하는 음식을 자유롭게 투표하는 것이 '선호투표'입니다.

호주가 복잡한 선거제를 유지하는 비결

호주는 또 '의무투표제'를 시행하는 나라다. '귀찮아서' 혹은 '하기 싫어서'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면 벌금으로 20호주달러(약 1만 7400원)를 내야 한다. 그 결과 투표율은 보통 90%를 넘는다. 지난해 연방 총선만 해도 하원 투표율 89.82%, 상원 투표율 90.47%였다. 1915년 퀀즐랜드에 최초로 도입됐던 의무투표제는 1925년 총선부터 연방 단위에서도 이뤄졌다. 1919년 선거에선 70%를 넘겼던 투표율이 1922년 60% 미만으로 급락한 일이 의무투표제 도입 계기였다.

이렇게 투표 자체도 복잡한데, 의무라니. '투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불만은 없을까. <오마이뉴스>가 만난 AEC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이 질문에 '교육이 해법'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AEC의 역할은 한국 선관위와 비슷하면서도 보다 선거 교육과 홍보에 방점이 찍혀 있는 모습이었다.


호주 수도인 캔버라 옛 의회 건물(old parliament)에 위치한 선거교육센터(NEEC)는 학생들에게 호주의 선거제도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선거교육센터는 매년 5~12학년 학생 8~10만 명을 오프라인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유성호

다음날 옛 의회(Old parliament) 건물에 있는 국립선거교육센터(NEEC)를 안내해준 알렉스 모리스(Alex Morris) AEC 선임공보담당관은 "호주 학생에게는 캔버라 여행을 와서 NEEC를 견학하는 일이 일종의 전통"이라며 "저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호주는 1984년 AEC 설립 후 선거교육용 교재 개발, 학교 방문 특강 등을 본격화, 2년 뒤 캔버라를 시작으로 지역별 선거교육센터(Electoral Education Centre, EEC)를 세웠고 캔버라 EEC는 2009년 NEEC로 거듭났다.

이곳은 매년 5~12학년 학생 약 8만~10만 명이 방문한다. 7월 7일에도 한 학교 학생 10여명이 찾아와 견학 중이었다. 이들은 1시간 30분 동안 호주의 역사, 선거제도 등을 공부하고 모의투표를 체험한다. 제일 먼저 시청하는 영상은 호주가 어떻게 영국의 식민지에서 자주국가로 나아갔는지를 설명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일 등을 소개한 다음 '이 화면을 보고 있는 당신이 바로 호주 민주주의의 주역'이라고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모리스 선임담당관은 "우리는 투표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교육한다"며 "내가 투표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당선돼 나를 대변할 텐데, 그렇다면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혜택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 시민들은 투표를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게 인식하지만 20호주달러가 많은 돈은 아니기에 '벌금 때문에 투표한다'고 보긴 어렵다"며 꾸준한 선거교육으로 제도를 이해시키고 참여도를 높인다고 했다.

'핫도그 맛집'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호주 투표일이 되면 투표소 앞에 일일 먹거리 장터가 생긴다. 유권자들은 핫도그 인기 맛집을 찾아 투표소 장소를 결정하기도 한다. ⓒ 호주 선거관리위원회(AEC) 제공

호주의 의무투표는 1924년 투표율을 높이고 유권자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해 투표를 의무화 했다. ⓒ 호주 선거관리위원회(AEC)

투표일을 축제처럼 보내는 호주 문화 또한 '즐거운 선거'에 기여한다. 한국과 달리 호주는 지정 투표소가 따로 없기 때문에 전국 약 7000개 투표소 가운데 어디든 골라서 가면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핫도그'다. 선거 당일 투표소 앞에는 자선단체의 먹거리 장터가 열리고 핫도그, 컵케이크, 샌드위치 등 명물이 생긴다.

"'어디에 가면 무엇이 맛있는지'가 투표소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곤 한다. 그날은 호주의 축제나 마찬가지다. 저도 어릴 적 아빠를 따라 투표소에 갔고, '나도 크면 당연히 투표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됐다. 이젠 제 아이와 같이 투표하러 간다. 투표일 이후 아이들 사이에선 어디(투표소) 가서 뭘 먹었는지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 그때 '나는 안 갔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었니'란 반응이 돌아온다."

선거라는 의무를 축제처럼 즐기기 위해 AEC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다. 캘러넌 선임담당관은 "우리는 투표의 작동 방식 같은 절차 자체에 대한 교육을 진행한다"며 "정당 정책과 홍보는 후보자와 정당의 몫"이라고 말했다. 또 "정당과 호부자는 언제든, 원하는 시기에 선거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며 "지금 당장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관련 법률이나 규정이 있지만 AEC는 선거운동 방식은 물론 후보 간 토론 등에도 대체로 관여하지 않는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AEC가 엄격하게 관리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정치자금이다. 후보자는 누구에게, 얼마를 후원받았고, 어떻게 썼는지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또 호주는 광고, 스티커, 포스터 등 다양한 방식의 선거 홍보가 가능하지만 정당이나 단체, 개인 등 메시지를 승인(authorisation)한 주체를 명시해야 한다. 캘러넌 선임담당관은 "대중들은 누가 이 메시지로 소통하려고 하고, 누가 이 메시지에 책임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정치인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큰 문제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호주 수도 캔버라의 옛 의회(old parliament)에 있는 선거교육센터(NEEC)에서 알렉스 모리스 호주 선관위(AEC) 선임공보담당관 등 관계자들로부터 호주의 선거제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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