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5 04:32최종 업데이트 23.07.2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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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인천시는 12일부터 개정된 조례를 적용해 난립한 정당 현수막을 강제 철거한다는 방침이다. ⓒ 인천시

 
얼마 전 인천시에서 정당 현수막을 강제 철거하는 현장 소식을 다룬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현수막 철거를 보던 시민들이 대체로 환영하더라는 소식이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매일 TV, 라디오, 유튜브 등에서 나오는 뉴스들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정당 현수막이라고 다를 리 없다. 주로 교통이 번잡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내걸어 두니 시선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공직선거법이나 옥외광고물법은 시민들에게 온통 하지 말라는 조항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정당에는 그렇지 않다. 정당은 "통상적인 정당 활동으로 보장되는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표시·설치하는 경우" 현수막을 제한 없이 걸 수 있다. 그러니 정당 현수막은 난장판 한국 정치를 그대로 재연하는 전시물이기도 하다.


필자가 굳이 정당 현수막에 꽂힌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동네를 지역구로 둔 한 정치인은 현수막 정치에 진심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른 정당 현수막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의 이름과 얼굴을 담은 현수막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현수막은 대체로 '괴담정치' '가짜뉴스' '거짓선동' '이권카르텔' 등을 타파하자며 정부와 집권여당이 연일 강조하는 구호들로 도배되어 있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광우병 위험, 그리고 사드도 '괴담' 반열에 올려놓았다. 국민 다수가 우려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사안이지만 정부가 제대로 해명하지 않은 채 강행한 결과 큰 사회적 갈등을 빚었고 지금도 빚고 있는 사례들이다.

돈봉투 의혹을 받는 야당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현수막도 곳곳에 내걸었는데, 정작 본인도 현재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수사받고 있고 당 윤리위에도 회부된 상태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수막은 한국 정치의 재연물 같은 거다. 아마 돈을 왜 받았냐고 물으면 '그건 괴담'이라고 할 것 같다.

걸핏하면 '괴담' '가짜뉴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국토교통위원회 실무 당정협의회를 가진 뒤 소통관에서 브리핑 하던 중 "서울-양평 고속도로 전면 백지화, 정치 생명 걸겠다"고 밝히고 있다. ⓒ 남소연

 
언제부터인가 괴담정치나 가짜뉴스라며 의혹 제기 자체를 뭉개는 것이 정치권의 습성으로 자리 잡은 분위기다. 의혹에 대해서든 합리적인 의문 제기에 대해서든 충분히 설명하지도 해명하지도 않는 일이 빈번해졌다. 대통령실 보도자료만 봐도 그렇다. 일단 가짜뉴스 등으로 규정하고 의혹의 신빙성부터 깎아내린다.

아니면 말고 식 무책임한 폭로가 많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정치 혐오만 키우는 허위 폭로가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을 책임진다는 이들이 걸핏하면  '괴담' '가짜뉴스'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 태도일까. 오히려 의혹 제기를 차단하고, 어떤 반응도 논의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까지 보인다.

실제 괴담몰이는 사안의 본질을 가리고 반드시 해명해야 할 것도 어물쩍 넘어가기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 서울-양평간 고속도로 특혜 의혹에 대한 원희룡 장관의 태도가 바로 그렇다. 애초부터 장관은 제기되는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야당이 '거짓 선동'을 하고 있다며 그것을 이유로 국책사업 백지화 선언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

현재까지 해당 고속도로의 양평 종점 변경에 관한 원희룡 장관과 국토교통부의 주장은 남김없이 기각되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뒤늦게 국토부는 "무책임한 괴담으로 국민이 피해"를 볼 수 없다며 국민 질문에 답하겠다고 한다. 제대로 해명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와 별개로 고속도로 종점의 급작스런 변경이 국토부의 독단에 의한 것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국정조사를 추진해야 한다. 국정을 책임진다는 이들에게 답하지 않을 권리라는 건 없다.
     
정권에서 연일 부르짖는 '이권 카르텔'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서 희화화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는 공인된 이권 카르텔이 존재한다. 검찰을 위시해서 전관예우라는 이름으로 부와 사법 정의를 맞바꾸는 법조계, 통신요금 담합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이동통신사들, 고가의 분양가로 수익을 거두지만 부실공사 책임은 하청으로 돌리는 민간건설사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현 정권은 노조에 대한 공격에 이어 시민단체를 이권 카르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 근거로 얼마 전 대통령실은 '비영리 민간단체에 지급된 국고보조금에 대한 감사 결과'에 관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최근 3년간 지급된 1만 2000여 개 사업, 6조 8천억 원이 감사 대상이었고, 이 중 1865건 314억 원의 부정 사용이 적발되었다'는 것이었다.

감사 대상이 된 비영리 민간단체는 각종 협회, 재단, 연맹, 복지시설, 시민단체 등을 포함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는 비영리 민간단체의 작은 일부이고, 그중에 재정적으로 독립된 활동을 하는 단체들은 지원금이든 보조금이든 받지 않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없다.

대통령실은 감사 결과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는 공개하지도 않았다. '정치 목적 단체 지원으로 부정사용' 등의 몇몇 사례가 간단히 소개된 정도일 뿐이다.

다양한 목적과 활동 방식을 가진, 영리 목적이 아닌 민간기관은 수없이 많다. 이들 중에는 정부나 지자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탁사업을 수행하는 곳도 있고, 청소년과 노인 등 공동체 구성원을 보살피고, 마을을 정비하는 등 각종 지원사업을 통해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가능성을 위해 역할 분담을 하는 곳도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복잡하고 분화된 사회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와중에 부정과 일탈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책임을 물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실의 감사 결과는 "시민단체들의 혈세 도둑질"로 둔갑하였고 "정부 보조금 나눠먹기 카르텔"로 이어졌다. '시민'을 내걸지도 않고 정치색도 없는 수많은 비영리 민간단체들이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표현에 따르면 졸지에 "정권에 빌붙어 빨대를 꽂는 '시민 참칭' 흡혈 기생 집단"이 되어 버렸다.

서울시 지원 대상이 공공기관, 노동조합, 대학, 언론, 종교단체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오세훈 시장이 "서울시가 시민단체 ATM기"라며 시민단체를 모욕했던 것은 또 어떤가. 구체적인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서울시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들에는 아예 법률로 각종 지원을 규정해 주고 있는데, 정작 실재하는 이권 카르텔은 손대지 않듯이 이런 지원은 그대로 유지한다. 이러고도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축인 비영리 민간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권력에 유착된 시민단체에 대한 퍼주기"라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을뿐더라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시민단체, 신뢰도 낮으니 필요 없다?
     

지난 7월 3일 자 <한겨레>에 실린 '[강준만 칼럼] 대기업과 시민단체, 누굴 더 믿나?' ⓒ 한겨레


최근 강준만 교수의 글이 매우 유감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강 교수는 <한겨레> 지면을 빌려 한국 행정연구원의 2021년 사회통합 실태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53.4%)가 시민단체가 비판, 감시하는 대기업에 대한 신뢰도(56.7%)보다 낮은데, 이런 시민단체가 왜 필요한 건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진 이유를 짚으면서, 대통령실의 비영리 민간단체 감사 결과와 최장집의 "정치적 지지와 특혜, 지원의 교환"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시민단체의 권력 유착과 거기에 따라 오는 돈, 그리고 시민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 정파적 투쟁의 선봉에 설 가능성을 우려하기까지 했다.

비영리 민간단체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나 부정 사례들과, 대기업을 비판·감시하는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 저하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박근혜 정권 당시 국정원 전경련이 배후에 있었던 것처럼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 정파적 투쟁의 선봉에 설" 시민단체가 또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식의 주장을 온라인상에 떠도는 말로 '뇌피셜'이라고 한다.

강 교수가 사회통합 실태조사를 두고 한 주장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조사 결과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이전과 다르게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신뢰도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런 정부조차 대기업보다는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나온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정부는 대기업을 관리·감독해서도 안 되고, 역시 대기업보다 신뢰도가 낮은 TV방송사나 신문사도 대기업에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신문사의 경우 시민단체보다 신뢰도가 더 낮고 검찰과 같은 수준의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신문이야말로 왜 필요한가. 시민단체보다 더 신뢰받지 못하는 신문이 시민단체가 왜 필요하냐는 주장을 싣는 것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시민단체는 완전무결하다거나 오류와 일탈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태원 참사로, 전세 사기로 고통받은 이들과 함께하며, 삶의 벼랑에 몰린 이들의 안전한 삶과 한반도 평화를 호소하는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이들에게 "정치적 지지와 특혜, 지원을 교환"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억측과 편견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혼돈의 세상이다.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서 '괴담'은 만들어지기도, 유포되기도 쉽고 낙인찍기도 일상화된다. 이 와중에 정권은 이권 카르텔에 이어 학교 현장의 비극을 초래한 문제에 대해서도 엉뚱한 허수아비만 계속 때리고 있다. 괴담정치 타파, 이권 카르텔 타파에 이어 동네에 걸릴 현수막이 무엇으로 채워질지 벌써 우려된다. 
 

박정은 /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 ⓒ 박정은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박정은은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이며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2000년부터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평화군축, 국제연대 활동에서부터 정치개혁, 검찰개혁 활동, 사회정책 관련 연대 활동 등에 주력했습니다. 2018년부터 4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직을 맡았고, 정치개혁공동행동 집행위원장,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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