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8 07:16최종 업데이트 23.09.1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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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주판)의 마지막 세대이자 컴맹 제1세대, 부모에게 복종한 마지막 세대이자 아이에게 순종한 첫 세대, 부모를 부양했지만 부모로서 부양 못 받는 첫 세대, 뼈 빠지게 일하고 구조조정 된 세대인 베이비부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폭염 속 근무 중인 급식조리원 ⓒ 연합뉴스


설거지를 좋아한다. 대학 자취시절부터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설거지가 귀찮지 않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닦는'게 좋아서다. 설거지는 그릇을 닦는 일이고, 걷는 것은 사색을 통해 마음을 닦는 일이다.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치환하는 행위는 마치 수양처럼 느껴진다.

퇴직 이후 가장 먼저 도전한 일은 한식 조리사 자격증이었다. 요리를 제대로 배워 창업을 해보고 싶었다. 한식은 아니지만 라면집을 차릴 요량이었다. 라면을 먹으면 밥을 무제한 서비스한다는 뜻의 상호도 정해 놨다. 아무래도 '먹는 장사'니 조리사 자격증을 따놓으면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요리학원 첫날, 도마와 칼 등 기본 도구를 챙겨 강의실로 들어섰는데 남자는 2명뿐이었다.

"어서 와요. 이번 차수엔 남성분이 적지만 보통은 많이들 다닌답니다."
"수업 들으면 자격증 따기 쉽나요?"
"합격률이 평균 30%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아요. 31가지의 요리에 대한 조리 과정을 숙지하고 있어야 해서 시험 난이도가 높은 편입니다. 이 중에서 2가지가 랜덤 출제되는 방식이죠."
"남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겠죠?"
"아무래도 평소 살림을 하는 사람이 유리하죠. 그래도 적극적으로 배우시면 합격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서 수업에서 31가지 요리를 15회에 걸쳐 속성으로 배우기로 했다. 제일 중요한 건 칼 쓰기였다. 모든 요리의 기본이 자르고 썰고 다듬는 것이기에 그렇다. 수업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31가지 요리의 레시피가 모두 다르고 순서도 제각각이어서 헷갈렸다. 그래도 열심히 배웠고, 어떤 요리의 경우엔 칭찬도 받았다.

재료 크기는 저마다 요구하는 센티미터(㎝)가 달랐고, 기름 쓰는 양도 기준이 있었다. 오징어볶음 요리를 예로 들면, 오징어는 반을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껍질을 벗겨 씻어야한다. 손질된 오징어의 안쪽에 0.3㎝ 간격으로 어슷하게 칼집을 넣고 가로 4㎝ 세로 1.5㎝로 썬다. 고추장 2큰술, 고춧가루1큰술, 설탕, 다진 마늘, 생강, 간장2작은술, 참기름, 깨소금, 후추를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생선요리를 할 때는 손질 방법 때문에 힘들었다. 노릇노릇하게 굽되 완전히 익히면서 모양도 잘 나와야 했다. 칼질할 때는 손이 베일까, 손가락이 잘릴까 예민해졌다. 다행히 필기시험은 달달 외워 85점으로 통과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 1시간에 2개의 요리를 만들되 60점을 넘어야 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최종 점수는 59점. 1점이 부족하다니,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대로 포기하기는 억울했다. 그래서 3주 후에 시험 보는 지역을 바꿔 재도전했다. 결과는 58점. 이번에는 2점이 부족했다. 입에서 '젠장, 제기랄'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조리사 도전기가 막을 내렸다.

인간기계로 11시간 노동, 몸에서 썩은 내가 났다  
 

음식점에 취업한 노동자 ⓒ 연합뉴스

 
그리고 도망치다시피 취업한 곳이 대기업 직원 식당 주방 보조였다. 아직도 인생의 최대 암흑기로 기억하는 시절이다. 조리사와 식재료 전처리하는 사람을 빼면 남성은 혼자였다.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은 모두 60대 이상으로 몸 성한 사람이 없었다. 3D직업(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분야의 일)이라 60대 이하는 버텨내지 못했다.

출근 첫날, 팀장은 위아래를 훑어보며 "우선 일주일 일해보고 그 이후에 정식으로 계약하자"며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오기가 생겼다. 직함은 '주임'이었다. 

"(벙거지처럼 생긴) 조리사용 모자, (두꺼운 비닐 재질의) 앞치마, 장화 받으세요. 조리사복은 지급은 하는데 별로 입을 일이 없을 겁니다. 고무장갑은 세 종류에요. 위생용, 전처리용, 설거지용입니다. 목장갑은 고무장갑 안쪽에 끼세요. 설거지할 물이 엄청 뜨겁거든요."

팀장의 경고는 사실이었다. 펄펄 끓는 대형 솥단지에 손을 넣었다가 통째로 익어버리는 줄 알았다. 아무리 중무장해도 고무장갑은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 녹아서 구멍이 뚫렸다.

이곳에서 하루 2000~3000인분의 그릇을 닦았다. 작은 그릇과 접시, 밥공기는 대형식기세척기로 돌리고, 덩치가 큰 주물냄비, 대용량 스텐 바트, 밥통 등은 일일이 세제를 묻혀 설거지했다. 6~8월 한여름 폭염 속에 세척 증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숨이 턱턱 막혀 졸도할 거 같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면 기계는 인간의 인지속도를 넘어서 세차게 세제 액을 뿌렸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쉴 수는 없었다. 앞쪽에서는 그릇을 넣고 뒤쪽에서는 세척·건조된 식기를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인간기계'였다. 그렇게 하루 11시간을 일하면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퇴근 무렵 옷을 짜면 땀이 흥건하다 못해 검은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대가는 월 240만 원에 못 미쳤다. 3개월을 거의 다 채웠을 때 퇴행성관절염, 손목터널증후군 등 5개의 지병을 얻었다. 결국 주방을 떠났다. 

이후 막노동을 시작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두 번째 암흑기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팔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팔뚝 근육이 나갔고, 병의원을 내 집 드나들듯 했다.

은퇴를 앞둔 사람이나 이미 은퇴한 사람 중 상당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종잣돈이라도 있으면 자영업, 돈이 없으면 생계유지를 위해 재취업에 나서지만 50대의 애매한 나이를 품어줄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라면집 창업은 꿈은 아직 접지 않았다. 여건이 된다면 작게나마 가게를 내고 싶다. 라면은 20대 청춘의 어느 언저리에서, 그것도 차디찬 자취방에서 시작된 나의 소울푸드(Soul Food)다. 그때의 라면은 가난을 상징했고 외로운 음식이었다. 라면처럼 가난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음식은 흔치 않다. 라면은 간식이 아니라 절박한 끼니였다.

'라면'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팅팅 불어 터진 면발을 보노라면 마치 불어 터진 심보 같다. 그 짭조름한 감칠맛은, 저렴하고도 습관적인 맛이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끓여야 더 맛있고, 배가 불러도 밥을 말아 먹어야 끝이 나는, 그 지난한 마무리는 습관이 아니라 위로다. 그 가난한 맛은 내 정서와 닮았다.

"아, 언제쯤 라면집을 차릴 수 있을까. 나를 위한 라면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라면을 끓이고 싶다."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 설치된 분식메뉴 배너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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