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9 11:29최종 업데이트 23.09.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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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성해졌는가 하면, 땅과 바다가 환경파괴로 신음한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4·3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는 한편으로는 새 공항 건설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천혜의 땅 제주도를 살기 좋은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주 사름(람)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기자말]

탐라국에서 현대사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굴곡진 역사를 간직하고 지역색이 확연한 제주야말로 역사문화의 보고라고 강조하는 문영택 질토래비 이사장. ⓒ 황의봉


"억눌리고 빼앗기는 등 외세에 당해만 왔던 제주역사에서 제주인들의 자주적인 힘으로 1000여 왜구를 쳐부순 을묘왜변 대첩은 자랑스러운 쾌거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저희는 5년여 전부터 현장을 답사하고 고증하여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주 역사문화의 현장을 답사하고 기록하여 새롭게 조명하는 데 앞장서 온 사단법인 질토래비 문영택 이사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왜구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제주인의 '별의 순간'을 강조한다.


을묘왜변은 1555년(명종 10) 6월, 40여 척의 배에 나눠 탄 1000여 명의 왜구가 화북포를 통해 상륙하여 제주읍성을 포위, 공격해 온 변란이다. 왜구들은 이에 앞서 전라도 영암 강진 달량 등 지역을 침범했다가 조선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제주도로 들이닥친 왜구는 성 밖 민가를 불태운 뒤 지금의 제주시내 동문로 동남쪽과 사라봉 사이의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 동문을 내려다보며 화살을 쏘아대 3일간 접전이 펼쳐졌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왜구의 대공세로 제주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으나 치마(馳馬)돌격대와 70인의 효용군을 선발해 적진을 정면돌파한 작전으로 전황을 일거에 역전시켜 왜구를 섬멸할 수 있었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올린 장계에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6월 27일 왜적 1천여 명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군사 70인을 거느리고 진 앞 30보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이희준, 보인 문시봉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이 흩어졌습니다. 붉은 투구를 쓴 왜장이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이 활을 쏘아 명중시켰습니다. 이에 아군이 추격하여 참획이 많았습니다."
 

을묘왜변 제주대첩 벽화 제주성지 남쪽 골목길에는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치마돌격대를 선봉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묘사돼 있다. ⓒ 사단법인 질토래비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는 지난해 말 제주연구원이 발간한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에서 "일본과 한반도 및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 요충지 제주가 왜구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지각변동을 초래할 사안이었다. 따라서 이 제주대첩은 당대 조선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서야 제주 지역 언론과 연구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질토래비 답사팀은 을묘왜변의 흔적을 쫓아 화북포구(왜구 상륙지로 추정)와 별도연대 별도환해장성, 사라봉수, 남수각 을묘왜변 전적지 표지석, 제주성지, 오현단, 제주목 관아 망경루, 운주당지구 역사공원 등 관련 현장들을 답사해 안내지도를 만들고 지역 언론에 기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문영택 이사장은 '을묘왜변 제주대첩'이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제주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일 때, 민관이 혼연일체가 됐을 때 실로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주인들이 목사 이하 모두가 일치단결해 단 3일 만에 왜구 대군을 대파한 사건은 항상 당해만 왔던 제주인들의 응축된 힘을 보여준 것 아니겠습니까. 4·3의 아픔을 사람들이 그대로 간직하고만 있었다면 오늘날에 이루어 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성과가 가능했을까요. 수많은 제주인이 단결해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을 해왔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교훈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했다는 사실입니다. 을묘왜변을 겪은 지 10년 후인 1565년 곽흘 목사 주도로 제주읍성을 동쪽으로 확장하여 동성(東城)을 쌓은 겁니다. 성 동쪽이 높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성내가 적에게 노출되기 쉽다는 점, 그리고 모든 식수원이 성 밖 산지천 유역에 있어 장기전이 되면 성내 사람들이 식수 문제로 곤란을 겪게 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주 역사문화 보존에 관심 가진 이들
 

문영택 이사장이 한림공고 교장 시절 학생들과 함께 1270년 삼별초와 1374년 최영 장군 부대가 입도한 한림읍 옹포리 포구(옛 명월포)에서 시작해 마대기빌레, 월계정사, 명월진성, 명월대, 만벵듸 4.3유적지를 잇는 10킬로 코스를 답사하고 있는 광경. ⓒ 문영택


문영택 이사장은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교육자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977년부터 2017년까지 40여 년을 프랑스어 교사로, 교감·교장으로, 교육청 교육국장으로 재직했다. 1997년에는 4·3을 소재로 한 수필 '숨은 죄밖에 어수다'를 문학지에 발표, 수필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가 질토래비를 창립하게 되기까지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이야기는 한림공고 교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고, 저에게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었죠. 당시 1학년 수학여행이 예정돼 있었는데, 아이들이 세월호 난리 통에 수학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학부모 동의서를 받아오면 보내주겠다고 했지요. 어느 부모님이 그 난국에 선뜻 동의해 주겠습니까. 철부지 학생들이 사회를 알아가는 계기가 된 셈입니다.

이때 제가 선생님들과 의논해서 이참에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을 시작해 보자고 했어요. 학교가 자리 잡은 한림(翰林, 한수풀)읍에는 유적지나 유물이 많습니다. 결국 수학여행 대신 역사문화 답사로 방향을 튼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답사를 시작하게 됐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 프로그램은 지역사회에도 알려지면서 한림공고와 한림읍이 협약을 맺어 일반인도 함께 참여하는 행사로 발전한다. 이때 학생과 주민들이 함께 답사한 곳은 1374년 최영 장군이 원나라 목호(牧胡, 원나라가 제주에 설치한 목장 관리를 위해 파견한 몽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상륙했던 명월포(현재의 옹포)에서부터 1950년 8월 예비검속 때 학살된 희생자들이 묻힌 만벵듸 묘역까지의 7∼8㎞ 코스.

답사 아이디어를 내고 원고를 작성해 답사자료를 만드는 등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문영택 교장은 얼마 안 돼 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아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수학여행의 대안으로 만들어진 이 답사 프로그램은 그가 떠난 후에도 지속돼 이제 한림공고의 전통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문영택 이사장은 2017년 교직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뜻밖에도 이 책이 이듬해 사단법인 질토래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제주에서 역사문화 보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돌하르방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하면서 단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 이사장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의 역사문화 현장에 관심이 많고 답사 경험도 쌓은 문 이사장을 단체의 장으로 추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질토래비는 2019년 12월 송년특집으로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산지천 계곡길, 제이각과 제주성지, 귤림서원, 탐라국 제사유적터, 관덕정 등 제주 원도심의 주요 역사문화 유적지를 답사했다. ⓒ 사단법인 질토래비

 
질토래비는 제주어로 '길 안내자'라는 뜻이다. 2018년 창립 이래 5년여 동안 질토래비는 제주도 각지의 역사문화 유산을 찾아다니며 고증작업을 하고, 안내 책자와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고, 기념비나 표지석 등이 필요한 장소를 찾아내 행정 당국에 설치해줄 것을 요청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런 모든 활동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지만 단 한 푼도 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게 질토래비의 자부심이다.

질토래비의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누구든 제주의 역사문화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도록 걷기 코스를 개장하고, 이를 안내지도로 만들어 대중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질토래비가 개장한 길은 동성·돌하르방 길, 돌하르방·신선길, 서귀포 역사문화 걷는 길,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 탐라·고을·병담길, 월라봉 역사문화 깃든 길 등이다. 이렇게 개장한 길을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도록 주요 포인트를 다시 간추려 안내지도를 펴내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가장 먼저 펴낸 '돌하르방 길을 걷다' 안내지도를 보면 ▲ 남북 돌하르방 길(제주의 수호신과 같은 돌하르방과 함께 옛 읍성의 자취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 6.8㎞, 3시간 내외) ▲ 중앙 칠성길(칠성골∼중앙지하상가∼탑동으로 이어지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 역사적 가치에 문화적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길. 7.2㎞, 3시간 내외) ▲ 동서 자복길(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미륵불, 나눔의 선행 만덕, 아픔의 역사 4·3의 흔적까지 되새겨볼 수 있는 길. 10.4㎞, 5시간 내외) 등 3개 코스로 나눠 제주 원도심의 핵심 명소를 모두 돌아볼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질토래비 창립 5주년을 맞아 <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걷다>라는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질토래비 창립 이래 답사했던 역사문화 유적지와 관련 인물들의 일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제주도 역사문화 인물의 백과전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꼼꼼히 다뤄 눈길을 끈다. 답사지역도 제주 원도심뿐 아니라 서쪽으로 애월읍과 한경면, 동쪽으로 조천읍, 남쪽 서귀포 일대까지 포괄하고 있다.

역사문화의 길 안내자 질토래비
 

질토래비에서 펴낸 단행본과 답사 지도 질토래비는 지난 6월 창립 5주년을 맞아 그동안 답사했던 내용을 종합한 총서 창간호를 출간했다. 몇해 전 만들어 배포 중인 제주 원도심 걷기 안내지도에는 중앙 칠성길, 남북 돌하르방길, 동서 자복길을 국문과 영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 황의봉


질토래비가 이처럼 단순한 답사에 그치지 않고 고증과 역사발굴을 토대로 길을 만들고 안내지도와 책을 펴내는 등 깊이 있는 활동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독특한 운영 시스템이 한몫하는 것 같다. 문영택 이사장의 설명이다.

"질토래비는 현재 64명의 이사와 360여 명의 일반회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사진 가운데는 자연생태 전문가, 오름 전문가, 역사문화 연구자, 혹은 예술가 등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요. 제주 출신이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분들도 있고요.

이사들은 매달 정기답사를 하고 있는데, 이때 답사 예정 지역의 유적이나 문화유산 인물 등에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춘 분이 주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답사 전에 자신이 연구하고 정리한 자료를 단체대화방에 올리고 코스를 설명하면 다른 이사들이 보완하면서 내실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또 지역사회 전문가나 마을 어르신들을 통해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기도 합니다.

일반회원들이 참여하는 답사는 3개월에 한 번 하게 됩니다. 이때는 이사진의 답사를 통해 확정한 코스에 안내 소책자를 곁들여 진행하게 되므로 더욱 완성도가 높은 역사문화 기행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질토래비 자체의 답사뿐 아니라 교육기관이나 단체 기업체 등에서도 길 안내 요청이 들어와 저와 이사들이 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질토래비가 창립 5년여 만에 제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답사 단체로 성장한 것은 이처럼 전문성을 바탕으로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고, 지도나 책자 등 자료를 만들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문영택 이사장은 제주도야말로 역사문화의 보고라고 강조한다. 자연과 문화, 언어 등에서 제주만의 독특한 지역색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탐라국과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의 격동기까지 굴곡진 역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 역사문화의 길 안내자로서 질토래비의 역할이 그만큼 소중한 게 아니겠냐고 말한다.

문영택 이사장은 <제주일보>에 매주 '질토래비 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열다'라는 글을 4년째(190회) 연재 중이다. 그가 답사한 장소 가운데서 제주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을 물었다.

"우선 아까 말한 을묘왜변 현장을 살펴보면 의미 있는 답사가 되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제주읍성이 일제에 의해 철폐되면서 성문과 성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쉬운 대로 당시 지대가 높은 허허벌판이어서 왜구들이 군막을 쳤을 것으로 여겨지는 지금의 제주동초등학교, 왜구들이 제주읍성을 내려다보며 불화살을 날렸을 운주당지구 역사공원과 여기에 세워진 을묘왜변 기념비, 제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초소였던 제이각 부근의 을묘왜변 벽화, 아마도 한밤중에 치마돌격대가 지나갔을 남수각 주변 다리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오름으로는 월라봉과 원당봉이 경치도 좋고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월라봉 일대는 중국에 말을 실어 보냈던 곳이라 해서 당포(唐浦)라고 불렸던 대평포구와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박수기정, 그 절벽 위에 있었으나 4·3 때 사라진 이두어시 마을, 오색토굴과 백토굴, 김광종 하르방이 1840년 전후에 바위를 뚫어 조성한 물길, 일제가 파헤친 갱도 진지 등 절경과 함께 다양한 역사문화를 품은 곳입니다. 저는 이 지역을 제주 최초의 역사문화공원으로 지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원당봉은 제주시 삼양동에 속한 오름인데 원나라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이름이 붙여진 곳입니다.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원당봉은 울창한 상록 활엽수림이 한여름에도 그늘을 드리워 사시사철 방문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최근 둘레길도 조성됐고 새해 첫날엔 많은 인파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에요.

이곳엔 고려 후기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 기황후(奇皇后)가 태자를 얻기 위해 원당사라는 사찰을 짓고 불공을 올린 후 태자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명나라에 의해 멸망한 중국 운남성의 백백태자와 가솔 60여 명이 탐라로 유배돼 이곳 원당봉 자락에서 살았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도 제주도를 유배지로 활용했다고 하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주 곳곳이 역사문화의 보배"
   

제주성지와 제이각 일제의 읍성 철폐령으로 대부분 훼손된 제주성은 오현단 남쪽에 일부가 복원되었고, 두어 곳에 그 잔해가 남아 있다. 제이각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읍성과 해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세웠다. ⓒ 사단법인 질토래비


문영택 이사장이 알려주는 제주도의 가볼 만한 곳과 이에 얽힌 사연은 이 밖에도 많다. 주변에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 등을 거느려 지조악(地祖岳)이라고도 불리는 따라비오름, 35만 평이 넘는 광활한 분화구로 현재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벼농사를 짓는 하논분화구, 지명이 똑같은 성산읍 수산리 고성리와 애월읍 수산리 고성리의 유래, "제 명대로 살지 못한 선인들이 죽어간 장소에 제 명을 살고도 더 살고자 욕심을 냈던 사람의 흔적을 만든 곳"(4·3 학살 터에 진시황이 불로초 구해오라고 파견했다는 서복을 기념한다는 비유)이라고 비판한 서귀포 서복공원 등으로 이어진다. 하논분화구 이야기만 간단히 소개한다.

"하논분화구는 5만 년 전의 기후와 식생을 간직해 생태계 타임캡슐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면서 동시에 제주의 다양한 역사문화가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1901년 제주의 대표적인 민란으로 꼽히는 신축봉기가 일어납니다.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하지요. 천주교도와 제주도민의 충돌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한라산 이남 천주교 최초의 성당이었던 하논성당이 이때 전소됩니다. 지금은 성당 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과 '화해의 탑'이 세워져 있지요.

당시 대정군수였던 채구석이 유혈충돌과 난의 확산을 막고자 중간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채구석은 금고형에 처해졌으나 도민들의 청원 등으로 2년 후 석방됩니다. 이 채구석의 아들 채몽인이 현재의 애경유지를 창업하여 대기업으로 육성시켰고, 채몽인의 아들 채형석이 제주항공을 제주도와 합작으로 설립하였지요.

하논을 떠올리면 프랑스에서 온 에밀 타케 신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축봉기 1년 후 부임한 타케 신부는 식물학자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에요. 일본에서 온주밀감을 도입하여 하논 서북쪽 과수원에 심어 감귤산업화에 기여했고, 특히 왕벚나무 자생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1908년 관음사 부근에서 채취한 벚나무를 유럽에 보냈고, 식물학의 대가인 베를린대 케네 교수의 연구 결과 벚나무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음이 밝혀져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토래비의 향후 계획에 관해 물었다. 문영택 이사장은 제주읍성의 사라진 성문들을 복원하자는 운동을 비롯해 돌하르방 제자리 찾기, 질토래비 답사 지도를 휴대폰에서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개발, 창립 5주년을 맞아 펴낸 500여 쪽 분량의 책에 수록된 내용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대중들과 공유, 질토래비 사무국에서 제주 역사문화를 주제로 한 정기적인 토크쇼나 세미나 진행 등 의욕적인 구상을 밝혔다.

교직에서 은퇴하면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과실수를 키우는 진짜 농부의 삶을 꿈꿨다가 제자뻘 되는 후배들에 의해 다시 길 안내자가 되었다는 문영택 질토래비 이사장.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그의 진정성이 공감대를 넓혀나가길 기대해본다.

"제주 곳곳이 역사문화의 보배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숨겨져 있어요. 이걸 찾아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만, 안타깝게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소수입니다. 저는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역사의식을 갖게 될 때 바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세에 일어난 일, 가까운 앞날에만 관심을 기울일 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긴 안목으로 과거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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