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7 10:52최종 업데이트 23.09.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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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6일 거행된 국군의 날 기념식은 윤석열 정권의 독립운동 재평가 혹은 폄훼가 지금까지 나타난 것 이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전투의 영웅인 홍범도만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언급이 윤 대통령의 건군 제75주년 기념사에서 강조됐다.

그동안 윤석열 정권은 독립운동가들을 여럿 폄훼했다. 폄훼를 당한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좌파 혹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거나 무장 투사들이다.


윤석열 정권은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홍범도에 대해 이미 충분히 모욕을 줬다. 이쯤에서 멈춘다 해도 홍범도는 설움을 당할 만큼 당했다. 윤석열 정권은 우당 이회영의 이미지에도 어느 정도 상처를 입혔다. 우당은 독립전쟁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중일합작은행을 털고, 일본 군용 선박을 공격하고 톈진(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이회영 손자인 이종찬 광복회장은 25일 기자간담회에서 육군사관학교 측이 교내 독립운동가 다섯 개의 흉상 중 이회영만 남기고 나머지는 이전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고, 자신이 이에 반발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윤석열 정권이 이회영만큼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다. 이종찬 회장은 윤 대통령의 죽마고우인 이철우 연세대 교수의 아버지다.

이회영은 홍범도만큼의 대승을 거두지 못했을 뿐, 일본에 상당한 두려움을 주었다. 육사에서 홍범도를 치우고 이회영을 남긴다 해도, 사실상 윤석열 정권의 이념에 반하는 인물이 육사에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홍범도·이회영·김원봉·여운형처럼 윤석열 정권이 이미 호명한 독립운동가들 말고, 윤석열 정권이 아직 공식 호명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은근히 건드리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다.

김구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윤석열 정권의 행보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모습. ⓒ 자료사진

 
윤석열 정권이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앞세워 이승만을 띄우고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김구에 대한 상당한 타격이 된다. 김구는 이승만의 분단정책을 반대해 남북통합을 이루려다가 이 정권의 하수인인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승만을 띄우는 보훈부 장관의 활동이 아무 견제 없이 계속되면, 반사적으로 김구가 더욱 더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민식 장관의 활동만 김구에게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간접적이지만 굵직하고 은근하게 김구의 위상을 흠집내고 있다.

지난 8·15 경축사 때 윤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 수립 시점인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 원년으로 선언한 헌법 전문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헌법 전문을 명확히 침해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헌법 전문에 입각한 발언도 아니다. 1919년 이후에도 건국운동이 계속됐다는 발언은 1919년에 건국이 이뤄졌다는 헌법 전문을 무색게 하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존중하지 않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이승만에게 타격을 주지는 않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당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적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김구는 다르다. 김구는 독립운동진영의 분열로 형해화된 임시정부의 간판을 끝끝내 지켜낸 인물이다. 김구가 임시정부 간판을 지키지 않았다면 임시정부 해방 이전에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3·1운동 6개월 뒤인 1919년 6월에 43세의 김구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됐다. 지금의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경비사무소 소장이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나는 안씨에게 정부 문지기를 청원했다"라고 회고했다. 임시정부 문지기나 하게 해달라고 안창호에게 당부했더니 경무국장 직을 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문지기로 시작한 김구는 임시정부를 끝끝내 지켜냈다. 임시정부 최고의 경비원 겸 정부 주석이었던 셈이다. 그는 해방 뒤에도 임시정부 주석 타이틀로 활동했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부정하는데도 그 직함을 사용했다. 해방 직후의 한국인들도 그 직함으로 그를 불렀다. 일례로, 1945년 11월 24일 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 바로 옆의 기사 제목은 '김구 주석 일행 23일 금의환국'이다.

임시정부의 적이 된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임시정부의 수호자였다. 김구는 해방 뒤에도 임시정부의 문지기로 살았다. 임시정부 주석 직함을 갖고 미국과 이승만의 분단 정책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가벼이 대하는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결국 김구를 폄훼하는 결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1940년에 김구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했다. 그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독자적 군대까지 지휘했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김원봉을 끌어들여 한국광복군 2인자로 만들었다. 김구가 육성한 한국광복군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된다. 헌법에 의하면, 국군은 광복군에서 태동한 조직이다.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26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국군의 기원을 해방 이후로 늦춰 잡았다. 국군이 광복 후에 태동했다고 명확히 언급했다. 한국광복군이 국군의 모체임을 부정한 셈이다.

이 발언은 건국절 발언과 맥락을 같이한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만든 한국광복군이 국군의 모체임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이 역시 김구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는다.

정권 기조와 반대되는, 김구가 상징하는 가치들
 

2023년 2월 27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컬러로 복원된 김구 선생의 사진이 테스트 송출되고 있다. ⓒ 연합뉴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직함에 가려 무장투사 이미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그 역시 김원봉이나 안중근처럼 의열투쟁에 참여했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다가 미수에 그친 이봉창 의사, 3개월 뒤인 그해 4월 29일 일왕 생일인 천장절에 상하이 주둔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이들은 모두 김구의 지원 하에 의거를 수행했다.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두 의거는 모두 다 일본인들의 금기와 관련이 있다. 일본인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가장 금기시하는 일왕의 신변이나 이미지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이봉창 의거는 일왕의 목숨을 겨냥한 것이고 윤봉길 의거는 일왕의 신성성을 건드렸다.

김구는 일본제국주의에 매우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일왕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의열투쟁을 배후에서 조종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김원봉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을 운영했다. 그는 해방 뒤에는 미국의 비위까지 건드렸다. 미국이 분단정책을 굳힌 뒤에도 북한을 오가며 남북통합을 추진했다.

김구는 미·일 두 나라뿐 아니라 윤석열 정권의 정책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김일성과 손잡고 분단을 막으려 한 그의 행위는 윤석열 정권 입장에서 보면 '자유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김구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추구하는 한미일 연대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권이 전개하는 이념전쟁 혹은 역사전쟁이 계속되다 보면 홍범도나 이회영은 물론이고 김구의 위상에도 악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건국운동 발언에 이은 윤 대통령의 '광복 후 국군 태생' 발언은 독립운동의 큰 축인 백범 김구에 대해 윤 정권이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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