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5 11:21최종 업데이트 23.10.15 11:21
  • 본문듣기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 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고 왼쪽에는 시위 군중들이 경찰의 발포에 쫓기고 있으며 도로가에는 시민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 10월항쟁유족회


윤석열 정권처럼 친일 문제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경고가 우리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나왔다. 그중 하나는 미군정하의 대구 10월항쟁(대구 10월 사건)이다. 대구 10월 폭동으로도 불렸던 이 사례는 친일청산과 관련된 한국인들의 분노가 일단 한번 터지고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양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46년에 발생한 이 사건의 주역들은 흔히 '좌익'이나 '좌파'로 불린다. 그런데 이 당시의 좌파나 좌익은 엄밀히 말하면 항일 운동가였다. 이들은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좌경화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미 그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 때 좌파 이념을 공부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할 생각으로 그 이념을 공부했다. 일본제국주의의 모순과 약점을 찾아내자면 그 공부가 최선의 길이었다.

이렇게 일제에 대항할 목적으로 좌파 이념을 공부한 사람들이 10월항쟁의 전면에 섰다. 항일 운동가 출신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들이 궐기한 것은 미군정의 경제적 실정이 임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친일파 청산이나 제국주의 청산이 미군정하에서 진척되기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0월 항쟁이 친일문제와 관련됐다는 점은 학계 논문에서도 충분히 강조됐다. 2004년에 <대구사학> 제75집에 실린 역사학자 허종의 논문 '1945~1946년 대구 지역 좌파세력의 국가건설운둥과 10월인민항쟁'은 이렇게 평한다.

"10월인민항쟁은 미군정이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을 군정의 요직에 기용하고 경제정책의 실패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무엇보다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미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2016년에 <민주주의와 인권> 제16권 제2호에 게재된 김상숙 단국대 강사의 논문 '1946년 10월 항쟁과 대구 지역의 진보적 사회운동'은 "10월 항쟁은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 잘못된 식량정책과 민생정책, 토지개혁 지연, 미소공위 결렬 후 좌익세력 탄압 등의 정세를 바탕으로 일어났다"고 평한다.

10월항쟁은 미군정의 지배가 친일청산이나 제국주의 청산을 도외시했음은 물론이고 이 지배가 한국인의 경제생활에도 해악을 끼쳤다는 점을 역사에 남기는 기능을 했다. 일제 식민지배뿐 아니라 미군정 지배체제 역시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지 않았음을 후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에 더해, 이 시대 한국인들이 미군정의 통치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도 함께 남겼다.

10월항쟁이 그처럼 강렬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 사건이 10월 한 달로 그치지 않고 그해 12월 중순까지 계속된 데도 기인한다. 또 대구나 경북에 한정되지 않고 남한 내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파급된 것도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10월항쟁은 짧게 보면 실패했지만, 역사에 증거를 남기고 다음 세대에 과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성공한 사례였다.

친일경찰 이성옥

그런데 이 사건이 그만한 성과를 내는 데 역설적 방법으로 기여한 인물이 친일경찰 이성옥이다. 친일보수 진영이 볼 때 그는 어이없는 행동을 했다. 그의 행동은 미군정에 맞서는 우리 국민들이 강력한 대항 수단을 갖게 만들고 10월항쟁이 생명력을 보유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런 점에서, 이성옥은 역설적 의미의 10월 항쟁 유공자다.

이 친일 경찰은 동학혁명 발발 전년도인 1893년 6월 8일 경상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성옥 편은 그가 30세 때인 "1923년부터 경상북도 왜관경찰서 경부보를 지냈다"고 알려준다.

대한제국 멸망 13년 뒤인 1923년에 '순사' 바로 위인 '경부보'였던 그는 이듬해에 '경부'로 진급하면서 안동경찰서로 옮겨갔다. 그 뒤 김천경찰서·안동경찰서·포항경찰서를 거쳐 1938년에 대구경찰서로 갔다가 2년 뒤 안동경찰서로 되돌아갔다.

한편, 1940년부터는 경찰 일을 하면서 대구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도 겸했다. 촉탁보호사의 임무는 사상범의 재범을 막는 일이었다. 석방된 항일투사들의 '원대 복귀'를 저지하는 임무를 겸했던 것이다.

이성옥은 늦어도 3·1운동 4년 뒤부터는 일본의 녹봉을 받았다. 26세 때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목격하고도 일제 경찰복을 입은 것을 보면, 3·1운동 당시 그가 시위대에 어떤 시선을 보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마음으로 늦어도 1923년부터 일왕의 녹봉을 받다가 20년 뒤인 1943년에야 퇴직했으니, 그의 재산은 사실상 친일재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친일재산을 축적하는 중에 그에게 수여된 표창도 많았다. 1932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인 쇼와(昭和)를 딴 '조선 쇼와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고, 1938년에는 훈8등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받고, 그 뒤에는 '지나사변 공로자 공적조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일본이 1937년에 일으킨 중일전쟁의 공로자로 선정됐으니, 이보다 확실한 '친일 인증'은 없을 것이다.

그에 더해, 1940년에는 일본 왕조의 역사가 2600년임을 전제로 하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그런 뒤인 1943년에는 경부 위의 경시로 특진하면서 퇴직했다. 이때 훈7등 서보장이 수여됐다. 일본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모범적인 경찰이었다.

이성옥은 해방 2년 전에 경찰을 그만뒀다. 그런 그가 해방 이듬해의 대구 10월 항쟁에 소환된 것은 그해에 미군정이 그를 불러냈기 때문이다. 1946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인사 왕래'는 "이성옥 씨(대구경찰서장) 입경 인사차 내사"라며 경찰서장이 된 이성옥이 서울을 방문해 동아일보사에 인사차 들렀음을 알려줬다.
 

1946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이성옥 씨(대구경찰서장) 입경 인사차 내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미군정의 실정과 친일청산 문제

미군정이 그런 친일 경찰들을 중용한 일을 합리화하는 논리 중 하나는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그런 테크노크라트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당일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 치안을 신속히 장악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굳이 친일 경찰이 아니더라도 한반도 치안은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었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그런 기구가 있었는데도 굳이 친일 경찰을 중용한 사실은 미군정의 반역사적 성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표다. 청산돼야 할 것을 사수하는 그 같은 반역사성을 드러냈기에 그것에 대한 저항이 10월항쟁의 모습으로 대구에서 폭발하게 됐던 것이다.

10월항쟁은 그달 1일부터 전개됐다. 이날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한 것이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다음날 대구경찰서·대구역·대구부청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시위대가 대구경찰서 등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군정은 강경 대응을 모색했다. 미군정의 존 프레지아 소령은 경북을 관할하는 제4관구경찰청장 권영석과 대구경찰서장 이성옥에게 군중 해산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성옥은 경찰서 앞으로 몰려드는 대구시민들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일제는 그에게 각종 훈장과 기념장을 수여했지만, 한국 민중이 궐기한 이 상황 앞에서 이성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찰이었다. 위의 허종 논문은 이성옥과 권영석이 그날 오전에 보여준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이들은 군중 해산에 소극적이었고 11시 45분경 경찰이 무기와 제복을 버리고 군정 막사로 피신하였다. 이어 12시경 프레지아 소령도 경찰서를 떠나자, 군중들이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성옥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대구 민중의 손에 무기를 쥐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미군정의 초기 대응을 약화시켜 10월 항쟁이 보다 강력하게 퍼지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행동은 미군정의 경제적 실정과 반역사성을 고발하는 대구시민들의 목소리가 전국적 호응을 얻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이 항쟁이 역사에 기록되고 역사적 과제를 남길 정도로 강력한 양상을 띠도록 하는 데도 긍정적 작용을 했다. 미군정의 실정과 친일청산 문제가 한국 민중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더욱 널리 알려지도록 데에 친일파 이성옥이 역설적 의미의 기여를 했던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한일협정을 강행하는 박정희 정권의 친일 노선에 맞서 1964년과 1965년에 거국적으로 궐기했다. 이 일은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간정부 대통령의 외피를 입었을 때 일어났다. 그에 비해 10월항쟁은 현역 미군들로 구성된 미군정에 맞서 일어났다. 제주 4·3항쟁(4·3사건)과 이 일은 그 정도로 대담한 사건이었다.

미군정하에서도 친일 문제에 불만을 품었고 그것이 봉기로 이어지는 하나의 원인이 됐다는 것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친일을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잘 증명한다. 대구경찰서장 이성옥의 근무지 이탈로 인해 한층 선명해진 우리 국민들의 역사청산 의지를 윤석열 정권은 무겁게 인식해야 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