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포스터 이미지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포스터 이미지 ⓒ 필름다빈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에서 열심히 활약하면서 신념을 굳게 지킨 이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군사독재로 정통성이 떨어지는 정권의 억압적 통제에 맞서 한국사회 민주화에 큰 몫을 기여한 이른바 '운동권' 출신들이 자연스럽게 전환된 경우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다양한 부문운동에 시간과 열정을 포함, 자신이 가용 가능한 자원을 투여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해온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종종 난감해하는 경우를 시간이 흐르면서 접하게 되곤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원하지 않던 이들이 당선되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선거에서 영 신통치 않은 성적을 내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예상 외로 가정 문제가 적지 않았다. 배우자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그토록 신념에 투철하던 이들이 자녀와의 갈등 때문에 벽에 부딪힌 것 마냥 힘들어하는 경우는 무척 낯선 풍경이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다양한 관점으로 관객이 접근 가능한, 일방통행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필자에겐 유독 그런 순간의 풍경과 겹쳐 보이던 작업이다.
 
전작 <피의 연대기>로 주목받은 김보람 감독의 신작은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모녀관계에 집중한다. 대안학교 교사로 굴곡진 삶을 살아온 엄마와 항상 바쁜 엄마 곁에서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있던 딸의 관계는 청소년 시절부터 비롯된 딸의 섭식장애 문제로 기나긴 공회전을 이어간다. 관련한 전개가 이 영화의 뼈대를 구축한다.
 
딸 '채영'은 15살부터 섭식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거식증 다음은 폭식증이다. 그렇게 병원과 집을 오가며 기나긴 방황을 개시한다. 섭식장애 때문에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평범함과는 거리가 까마득히 먼 상황이다. 그럼에도 용케 무사히 성년을 맞이했고 일상에 제약이 있긴 해도 살아남았다.
 
엄마 '상옥'은 무주의 한 대안학교 교사다. 그는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세상을 뒤엎으려는 꿈을 품었던 '전사'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그런 '혁명'의 꿈은 퇴색되고 만다. 이제 평범하게 남들처럼 생활인, 그것도 '싱글맘' 신세다.(남편의 존재는 영화 끝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상옥은 혼자 아이를 부양하며 자신 또한 생존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한다. 과외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지만 마치 연옥에 갇힌 것 같던 시간이다. 그러던 중에 어딘가 정착을 꿈꾸며 정규교사도 아닌 기숙사 사감으로 무주의 대안학교에 내려온다. 어린 딸 채영과 함께였다.
 
그렇게 채영은 무주의 산골에서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대안학교는 타 학교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아이들이 내려오다 보니 엄마 상옥은 그 아이들의 엄마나 자매 역할을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학교는 물론 인접한 모녀의 거처 역시 수업의 연장처럼 아이들이 들락거린다. 2인 가정이지만 늘 집에는 학생이자 언니 오빠들로 가득했던 셈이다. 채영은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를 독점할 기회도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상황에도 잘 적응해 거대한 대가족의 일원처럼 살아갈지 모르지만 채영은 그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절박함을 큰소리로 외치기엔 너무나 사리판단이 빠른 아이였기에 그 상처의 틈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점점 벌어져만 갔다. 그리고 십대 중반에 섭식장애로 분출하고 만다.
 
이 모녀가 사는 법, 기나긴 평행선의 시간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스틸 이미지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의 시작은 그런 채영의 생존기이다. 다행히도 관객은 지금 현재 시점에서 채영이 살아남은 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주의는 필요하지만 그럭저럭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체크한 뒤 관객은 채영이 들려주는 생존기에 빨려들기 시작한다. 채영은 거식증을 겪고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 후부터는 정반대로 폭식증을 체험한다. 입 속에 무엇인가 밀어 넣을 때에만 역설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그로 인한 급격한 신체 변화에 시달린다. 그 이후 십여 년 동안 채영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삶을 지속하는 중이다.
 
이어지는 전개는 이제 엄마 상옥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상옥은 1980년대를 수놓은 강경 운동권이었고 그 시절 또래 여성들의 전형과 운명을 뛰어넘고자 했던 특별한 존재다. 몇 장의 사진으로만 당시의 흔적이 소개되지만 한눈에 봐도 비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혁명을 꿈꾸던 시대에서 일상으로 세상이 바뀌자 순식간에 상옥은 세상에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어린 딸과 함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을 보내던 상옥은 무주로 내려와 대안학교에 정착하면서 자리를 잡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된다. 언젠가는 다시 '전선'에 복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도 품었음직하다. 하지만 그 순간 딸의 섭식장애가 시작되고 만다.
 
다행히도 채영의 섭식장애는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딸은 죽지 않았다.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해나간다. 물론 평범한 이들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그림일지언정 아무튼 살아남았다. 그렇게 구사일생을 거치며 생환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이어진다. 오랜 투병생활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경력도 학력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채영은 (그나마 돈을 버는)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종속성을 끊어내고자 채영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새롭게 자기 힘으로 출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엄마 상옥은 그런 딸의 결단을 안절부절 해가면서도 결국 막아서지 못한다. 출국을 위해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대며 가녀린 딸이 들고 나서자 안쓰러움이 표정에 가득하다. 끝내 감정을 참지 못하고 모녀는 얼싸안는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채영은 한국에서처럼 제약이 덜한 호주 생활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외부적 조건이 발생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호주에서 일하던 쇼핑몰들이 문을 닫으면서 부득이하게 채영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막상 돌아오니 엄마 상옥 외에 돌아갈 곳이 없다. 모녀는 다시 재회하고 한동안 함께 삶을 이어가게 된다. 초조한 마음이던 채영은 조금씩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기 시작한다.
 
삼대의 여성사를 발견하고 소통하다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스틸 이미지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채영은 어릴 적부터 내내 바쁜 엄마 대신 외할머니와 이모의 돌봄 속에 자랐다. 엄마 대신 이모가 보호자 노릇을 해왔고, 외할머니는 엄마가 못 챙기는 끼니와 간식을 돌봤다. 그런 추억을 되새기던 중 채영은 어릴 적에는 그리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을 뒤늦게 포착하게 된다. 할머니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스스로 묻고 답하며 탐정처럼 추리해본다. 부족한 정보는 내키지 않아도 달리 확인할 길이 없으니 어렵게 입을 떼어 엄마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상의 무미건조한 대화 대신에 뒤늦게야 가족사를 포함해 모녀는 둘 사이에 꼭 필요한 대화를 개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진실이 밝혀진 건 덤이다. 평행선을 달리며 십여 년을 경유해온 모녀관계는 겉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였다. 어쩌다 천형처럼 섭식장애를 앓게 된 딸과 성실하게 맡은 자리를 소화하며 자식 때문에 고심하는 엄마의 전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로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둘 사이에 아무 것도 정작 공유되는 게 없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실소하고 마는 상옥 vs 그걸 이제야 알아차렸냐는 채영의 푸념이 동시에 터져 나올 때가 되어서야 둘은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된다. 한참 너무 멀리 돌고 돌아 당도한 길이지만 마침내 채영과 상옥, 두 사람은 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영화는 섭식장애 당사자의 사연과 투병기라는 선입견에 기울지 않는다. 대신에 그런 상황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당사자가 견뎌내고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진통을 거쳐 가며 '가족'의 역할과 의미를 회복하는 모녀의 이야기로 잔잔하지만 풍요로운 결실을 수확하고자 한다. 여기에 비록 생전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외할머니 '금주'의 비중이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다. 외할머니(+이모)의 존재감이 영화 속에서 풀이되지 않았다면 1시간 30분 내내 모녀간의 밀고 당기기에 관객도 지치고 주인공들도 나가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3대에 걸친 여성 세대의 경험담이 중첩되면서 엄마 상옥과 딸 채영의 세상과 맞서고 적응하는 과정은 단지 좀 특별한 상황에 처한 개별의 체험을 넘어선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경유해온 이들이라면 공감이 어렵지 않을 여성들의 현대사로 순식간에 이야기가 확장된다. 그런 효과는 박씨 가문의 여성들에게 계승된 생애를 관객이 접하면서 극대화된다. 채영에게 외할머니는 두 개의 은혜를 선물한 존재다. 첫 번째. 섭식장애를 겪게 된 자신에게 음식의 가치와 매력을 남겨준 존재로서, 두 번째. 외할머니 또한 평생을 자신처럼 먹고 토하며 견뎌낸 존재라는 점이다. 풀 길 없는 삶의 고통을 자신의 몸을 학대해가며 버텨낸 외할머니의 생애를 이해하는 건 채영에게 고립을 벗어나 타인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엄마 상옥이 외할머니의 성년 이후 삶과 함께한 구토에 대해 설명할 때 채영은 자신이 섭식장애를 고통스럽게 겪으면서 역설적으로 느꼈던 자기 삶의 주도권, 능동성의 원인을 확인하게 된다. 오직 그렇게 자신을 파괴하는 것만이 스스로에게 가능했던 표출의 방식일 수밖에 없던 외할머니의 '전통과 관습'이란 명목으로 억눌렸던 삶을 보고 자란 딸은 각성한다. 그래서 세상을 뒤엎고 포효하고자 했지만 좌절한 채 날개가 꺾이고 땅으로 추락한 존재이던 엄마, 그리고 대외활동에 활약하는 대신 자기와는 소통할 줄 몰랐던 엄마에게 실망하고 좌절한 딸에게로 이어지는 삼대의 여성사를 채영은 반추하게 된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 우리에게도 차려지기를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스틸 이미지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제목처럼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의 문을 연 것이 외할머니의 제사상이라는 점에서 본 작품이 드러내는 여성 생애사적 접근법은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렇게 얼핏 평생 죽을 때까지 평행선을 계속 달릴 것만 같았던 채영과 상옥의 관계는 구조적 변화로 향한다. 어떻게 보면 그저 '거리두기' 간격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각자 한 사람의 주체로서 자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경과다. 본래 장성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는 떨어져 있어야 유지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채영은 살아남아 하루하루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며 자립에 힘 쏟게 된다. 외할머니가 곱게 끝단을 손질해 정성들여 삶아내던 고구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재능과 의지로 본인은 물론 타인과 소통하고 기여할 수 있는 몫의 일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섭식장애는 채영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이긴 하지만 자신의 일부로 유지관리 가능해진다. 질병과 장애를 대하는 관점에서 채영의 인식과 선택은 역시 개인의 사례를 넘어 또래 세대 전반에 공감대를 얻기 충분한 폭을 확보한다.
 
그리고 상옥은 거대한 세계에 부딪히다 처음 좌절한 후 거듭 겪어온 좌절의 끝에서 자신이 정작 등잔 밑은 살피지 못했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아내고 만다. 그렇게 각자에게 채워지지 못했던 빈 구멍을 온전히 발견하는 데 무척 오래 걸리긴 했지만 돌고 돌아 길을 찾아낸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그렇게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두 사람의 미래가 순탄하기를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주제곡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기원하게 될 테다.

지금도 엄마 상옥은 무주의 대안학교를 지키고 있고, 딸 채영은 자신의 투병과 생존의 기록을 영화 개봉과 맞물려 <이것도 제 삶입니다: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오월의봄, 2023)으로 펴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뒷이야기가 궁금해 책을 찾게 될 만한 작업의 결실이다.
 
<작품정보>
두 사람을 위한 식탁 A Table for Two
2022|한국|다큐멘터리
2023.10.25. 개봉|91분|12세 관람가
감독 김보람
출연 박채영, 박상옥
글/그림일기 박채영
제작 킴프로덕션
배급 필름다빈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
2023 13회 베이징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언급상
2023 11회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
 
2022 48회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
2023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 부문
2023 18회 런던한국영화제, Women's Voice 섹션
2023 23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본선
2023 10회 춘천영화제, 초청
2023 19회 인천여성영화제, 초청
2023 16회 전북여성영화제, 초청
2023 24회 제주여성영화제, 초청
2023 10회 부산여성영화제, 장편경쟁
2023 11회 창원여성인권영화제, 초청
2023 9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초청
2023 7회 통영여성영화제, 초청
2023 6회 머내마을영화제, 초청
두사람을위한식탁 김보람감독 박채영 박상옥 이것도제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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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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