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9 17:29최종 업데이트 23.11.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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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SNS 상에서 #여성_숏컷_캠페인이라는 해시태그 캠페인이 재등장하고 있다. ⓒ pexels

 
#1. 2년 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여성 대학생들과 스타벅스에서 얘기를 나눴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내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자, 한 학생이 말했다. "기자님, 목소리를 좀 낮춰서… 누가 들을 거 같아요." 내가 반문했다. "누가 들으면 안 돼요?" 의아해하는 내 얼굴 위로, 그는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를 할까 봐서…" 두 눈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2. 최근 경북 지역의 한 여고에 진로 강연을 다녀왔다. 휴식 시간, 한 학생이 다가왔다. "기자님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뭇 비밀스러운 어조였다. "세상에 성차별이 엄존한다는 걸 알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게 페미니즘인데요. 거기에 찬반이 있을 수가 있나요?" 그러고서, 나는 덧붙였다. "근데 왜 아까 질문 시간에는 질문을 안 했어요?" "다 있는 앞에서 얘기하기가 그래서…" 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성_숏컷_캠페인'이라는 해시태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 다시 한 번 나부끼고 있다. 나는 2021년 7월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를 향한 '페미' 낙인에 맞선 여성들의 '숏컷 캠페인'을 가장 먼저 주목했던 기자다. 당시 안 선수에 대한 공격을 두고 국내 언론은 '논란'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로이터나 BBC 같은 외신들은 '온라인 학대'라고 분명하게 정의 내렸다.
 
2년 세월이 흘러, 그 황당 사례는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여성을 향한 물리적인 폭력으로 재현됐다. 지난 4일 경남 진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여성 아르바이트생이 20대 남성에게 '숏컷 페미'라는 이유로 폭행당했다. 가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머리가 짧은 것을 보니 페미니스트"라며 "나는 남성연대인데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안티 페미니스트들에게 '효능감' 느끼게 해주는 사회
 
'페미'에 대한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은 연원이 오래됐다. 2016년, 게임제작사 넥슨이 페미니즘 성향을 이유로 김자연 성우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2021년에는 '집게 손' 이미지를 두고 '남성혐오'라는 공격이 자행되며 20개가 넘는 공공기관과 기업들에서 관련 이미지를 삭제했다.
 
게다가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게임 업계 여성 노동자들은 과거 SNS에 여성 인권 관련 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남성 유저들의 공격을 받아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다.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진이 말한 '유모차'를 제작진이 성평등한 용어인 '유아차'로 바꿨다가 남초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어졌다. "제작진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다"라며 색출에 나선 것이다.
 

유튜브 채널 뜬뜬에 올라온 의 화면. 출연자가 '유모차'라고 말한 것을 자막에 '유아차'로 표기했다는 이유로 해당 채널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 DdeunDdeun

 
문제는 이들에게 효능감을 부여하는 사회다. '페미'라는 이름의 사상검증과 공격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성행하는 동시, 여기에 굴복하며 사과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더욱 효능감을 얻는다. 지난 9월 모바일 게임 '가디언 테일즈'의 코스튬 공모전 당선자를 두고 '페미 논란'이 일자 카카오게임즈는 당선작의 게임 구현을 취소하는 한편, 유저들에 '불편함'을 이유로 사과했다.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해당 작가를 보호해야 할 제작사가 매번 백기를 들고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이 게임 업계에서 반복되는 행태다. 후보 시절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선언한 대통령이나, 성평등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나선 여성가족부처럼 정치권이 이러한 구조를 적극 뒷받침하고, 때로는 선동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더 직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 pixabay

 
그 와중에 페미니스트들이나, 미디어도 전선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공공연히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고 페미니즘 말하기'를 실천 중이라고 말하고 다닌 지 꽤 오래 되었다. '페미'를 둘러싼 전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그 단어 자체에 질려하고, 거기에 예민한 축들에겐 낙인의 공포를 불러 일으키거나(페미니스트), 분노의 대상(안티 페미니스트)이 되기 때문이다. 현장 기자들을 인터뷰해 성평등 보도의 개념과 실천을 연구한 류란(2023)은 실제 기사에서 페미니즘 대신 대체어를 찾는 기자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페미니즘 대신에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뉘앙스를 갖는 '젠더'나 '여성주의' 같은 단어로 대체하는 식이다.
 
"숏컷이 무슨 문제가 되나요?"라는 말은 100% 맞다. '숏컷'은 문제가 될 수 없다. '페미'도 마찬가지다.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준동으로 '숏컷'이 문제가 된 환경, '페미'가 논란거리가 된 현실은 문제다. 그러한 상황이 엄존한다는 것, 그래서 카페와 심지어 여학교에서도 '페미'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려워한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숏컷을 이유로 폭행당하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누군가는 둔감하거나, '일부 남성'의 문제로 미뤄놓던 사이 여성들을 향한 위협은 기우가 아닌 실체로 드러났다.

그래서 나는, '페미'라는 말을 돌려놓기로 다짐한다. 적극적으로 '페미'를 말해야겠다고. 오염된 단어를 재정의하기 위해 그래야겠다고 생각한다. 여고생이 학교 안 강의실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조차 발화하지 못하는 단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돌이켜 보면 그날의 강연에서,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 학생이 나를 따로 찾아온 것 같다).
 
더불어 염려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와 질문을 했던, 그리고 카페에서 나의 안위를 걱정하던 젊은 여성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뭐가 문제냐'던 식의 내 무성의한 질문이, 그들에게 힐난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종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늘 분투하는 그들인 것을, 나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류란, 2023, '성평등 보도의 개념화와 실천 – 현장 기자들의 심층 인터뷰를 중심으로', 서울대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학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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