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9 11:17최종 업데이트 23.11.2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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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전경 ⓒ 권우성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주소다. 전면 개방되기 전까지 포털 지도에서 청와대를 검색하면 산림처럼 녹색으로 땅 경계만 표시됐다. 보안 때문이다. 기자들이 상주하는 춘추관만 유일하게 건물명이 표기됐다.

높은 담장과 빈틈없는 경계, 빡빡한 출입 검사로 보호됐다. 청와대 외곽을 둘러선 경비단 자동 소총에는 인마살상용 실탄이 들어 있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은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경비단원의 선글라스와 검은 제복의 위용은 당당함을 넘어 위압적이다. 지은 죄가 없어도 그 앞을 지나면 괜스레 위축됐다.


청와대에 구중궁궐(九重宮闕), 불통, 제왕적 통치 이미지가 붙은 지 오래다. 군사정권 때는 물론 문민 통치 시대에도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청와대를 나와 광화문에서 일하겠다고 공약했다. 불통과 차단의 상징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2017년 4월 24일 광화문 대통령 공약 기획위원회가 출범했다. 문재인 후보는 "단순한 장소 이전을 넘어 불통의 시대를 끝내고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말했다. 5월 10일 대통령 취임사에도 그 뜻을 담았다.

"권위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서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참모들과 머리와 어깨를 맞대고 토론하겠습니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 여러분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 (중략) '광화문 시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과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따뜻한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으로 남겠습니다."

'소통으로 통합하는 광화문 대통령'은 새 정부 20대 국정전략 중 두 번째 항목이다. 그만큼 중시됐다.

역대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2층 집무실에서 일했다. 비서동에서 500m쯤 떨어져 있다. 문 대통령이 취임 첫날 결재 서류에 서명하는 장면을 연출한 곳이다.

비서동인 여민관(與民館)에서 본관까지 약간 오르막길이다. 성인 걸음으로 집무실 테이블에 닿기까지 8~10분 정도 걸린다. 소지품 검색 등 보안 절차까지 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비서동에서 본관까지 걸어가면 땀이 뻘뻘 났다. 물리적 거리도 거리지만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졌다. 바라다보이는 건물과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차이가 그만큼 크다.

청와대 본관에 들어서면 절감하는 게 하나 있다. 공간이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공간을 지배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자다.

당신이 장관이라고 치자. 보고할 일이 있다. 대통령에게 장관실이나 동네 카페로 오라고 할 수 없다. 천생 대통령 집무실로 가야 한다. 그것도 사전에 허락받아야 한다. 대통령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쓴소리꾼'이라도 마찬가지다. 보는 앞에서 따지려면 집무실로 찾아가야 한다. 그를 방에 받아들일지도 대통령이 정한다.

본관 정문을 들어서면 붉은 카펫이 깔려 있다. 고급 호텔에 깔렸을 법하다. 걸을 때 발바닥 충격이 둔해질 정도로 두툼하다.

천장은 높고 계단은 많다. 보통 건물의 2배는 되는 듯하다. 거길 다 걸어 올라가면 소리가 울릴 정도로 큰 방이 나온다. 집무실이다. 그 방문이 열리기 전, 즉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공간에 압도된다.

군주나 독재자가 누리는 공간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높고 넓고 화려한 실내, 육성으로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 테이블, 혼자만 서는 높은 단상.

광화문 이전을 거듭 검토했으나
 

2017년 5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여민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여민관 집무실이 본관 집무실에 비해 좁기는 하지만 업무를 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며 "본관 집무실은 행사 때에만 사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화려한 본관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곳은 국무회의 때나 외국 정상 등 주요 인사 접견 때만 썼다. 대신 비서동 여민1관 3층에 짐을 풀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마련한 곳이다.

비서동 명칭 '여민관'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명명했다. '국민과 함께하는(與民)' 곳이라는 뜻이다. 여민1관 대통령 집무실 밑 2층에는 비서실장실과 국정상황실, 1층에는 정무수석실 등이 있다. 내가 연설 기획비서관이 됐을 때 정무수석실 한쪽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1관과 마주 보는 여민2관에는 정책실장실 산하 수석실과 민정수석실 등이 자리했다. 1관 옆 건물 여민3관에는 국가안보실과 국민소통 및 시민사회수석실이 있다. 홍보 기획비서관 1년 반을 여민3관 1층에서 보냈다.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청와대 사무실은 근사하다. 널찍하고 멋지다. 푹신한 가죽 소파, 깔끔한 책상과 의자. 다 연출이다. 비좁고, 집기는 낡았다. 내 방에서 새것은 문재인 대통령 로고를 새긴 원형 벽시계와 업무수첩밖에 없었다.

홍보 기획비서관 사무실은 네댓 평쯤 될까. 그 안에서 10명이 일했다. 사무실 안에 따로 1.5평쯤 되는 비서관 방이 있었다. 사무실 구석에 ㄱ자 형태 간유리로 임시 벽을 세웠다. 나머지 두 면은 콘크리트 벽이다. 창문도 없다. 점심을 건너뛰고 컵라면이라도 먹으면 냄새가 종일 가시지 않았다.

책상, 회의용 탁자가 공간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 방에서 대여섯 명이 회의하려고 앉으면 눌러 싼 소풍 도시락 소시지라도 된 느낌이었다.

여민2, 3관은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았다. 예산이 없어 못 고쳤다.

그래도 장점이 있었다. 급해서 뛰면 2~3분 이내에 대통령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문 대통령 취임 후 광화문 이전을 거듭 검토했다. 대통령 주재 회의나 비서실장 주재 회의에서 검토 내용이 보고됐다. '문제가 있다'라는 단서가 따라붙었다.

대통령 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안전이다. 대통령에게 어떤 종류의 위해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위해 요소로부터 차단돼 있거나, 위해 시도가 있어도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청와대는 외부에서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 물리적으로 높은 담과 벽으로 막혀 있다. 검색과 조회, 경호 등 체계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만큼 안전을 도모하려면 경호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옮기면 건물 전체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 드나드는 사람은 제한되고, 출입 절차는 더 어려워진다.

광화문 정부 청사 인근에는 높은 건물이 많다. 그곳으로부터 시선과 접근을 차단하려면 집무실에는 방탄과 경호 장치를 최고 수준으로 설치해야 한다. 대통령이 관저에서 광화문 집무실로 출퇴근할 때 교통이 혼잡해진다. 청와대 헬기장으로 가려고 해도 교통을 통제해야 한다.

또 다른 난관도 있다. 보안 시설 이전이다. 컴퓨터를 옮기고 랜선을 까는 차원이 아니다. 청와대 내부에는 유사시 지휘·통제하는 등 극비 시설이 있다. 안에 뭐가 있는지도 기밀이다. 20여 년에 걸쳐 쌓인 노하우로 운영되고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산이다.

걸림돌이 자꾸 나왔다
 

2019년 1월 4일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 자문위원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청사 이전 보류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광화문 시대 위원회는 "대통령 집무실을 현 단계에서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는 것은 어렵다고 결론지었다"며 "광화문 재구조화 작업이 마무리 되면 다시 추진하겠다"는 방안을 대통령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광화문 대통령 공약은 원래 '즉각 시행'이었다. 2017년 6월 19일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추진 계획 마련'으로 바꿨다. 미뤄진 셈이다.

2018년 2월 2일 행정안전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세종시 이전 계획이 발표됐다. 2019년 말 예정이다. 시설 활용방안으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임명해 검토케 했다.

그 뒤 검토 과정에서 걸림돌이 자꾸 나왔다. 문 대통령도 부정적 견해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연말에 즈음한 한 회의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대통령 집무실의 광화문 이전은 공약한 것인데 지금 할 계제인지 의문이다. 경기가 좋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경제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추진할 사업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

그럼 남는 게 청와대 개방과 관저 이전이다. 청와대 최대 개방은 찬성이다. 북한산도 다 개방하는 것이 좋다. 관저는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공사가 금방 되는 것도 아니고, 공사비만 백 몇십억 원이 든다. 경호체계도 새로 구축해야 하고. 이 시기에 해야 할지 의문이다.

호황이었으면 부담이 덜하겠지만, 아무래도 어렵다. 수백억 원이 들어가고, 국민이 보기에도 절실하지 않다. 판을 새로 짜고 경호체계도 새로 짜고 그러면 국민이 불안해할 것이다. 현재 공관은 (경비가) 철통같지 않으냐.

집무실을 옮긴다 해도 (청와대) 헬기장은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청와대 내 보안 시설이 있다. 유사시 모든 상황을 한 자리에서 보고 지휘까지 할 수 있다. 커튼을 옮겨 달듯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2019년 1월 4일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 자문위원은 문 대통령에게 공약 검토 결과를 보고했다. 이어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유 위원은 "집무실을 현 단계에서 광화문 청사로 이전할 경우, 청와대 영빈관과 본관, 헬기장 등 집무실 이외의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며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이 마무리된 이후에 장기 사업으로 검토하기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1월 7일 티타임에서 이를 거론했다. 참모들은 저간의 사정을 안다. 그런데도 자신이 직접 설명할 필요를 느낀 듯했다.

문 대통령은 "출퇴근하는 대통령 모습을 시민이 보면 대통령 문화가 많이 달라지는 의미가 있어 (집무실 이전에) 역점을 뒀다"라며 "그런데 이 시기에 그걸 착수할만한 우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공약을 깬 셈이다. 마음에 걸린 듯했다.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다시 말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행안부 이전 계획을 보고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받아 이렇게 말했다.

"막상 여러 가지 검토를 해보니 아주 의미 있는 공약이라고 하지만 경제가 엄중하다고 하는 이 시기에 많은 리모델링 비용을 사용하고 그로 인한 행정상의 불편이나 혼란도 상당 기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걸 다 감수하고서라도 꼭 이전할 만큼 우선순위가 있는 과제냐는 점에 국민께서 과연 공감해 주실까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야당도 집무실 이전을 보류한다는 발표에 공약 파기라고 비판하지만, 막상 이전한다고 하면 '지금이 그렇게 할 시기냐'라고 반대로 비판할 것이다. 당분간 보류하고 서울시가 추진하는 광화문 재구조화를 봐가면서 다시 판단하겠다. 국무위원들이 이를 국민께 공유해달라."


제왕적 대통령 잔재는 청산됐나?
 

2022년 4월 2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국민청원 답변을 하고 있다. ⓒ 청와대


공약을 끝내 이행하지 못했다. 3년이 흘렀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당선됐다.

임기 말 청와대 국민 청원에 '대통령 집무실 이전 반대'가 두 건 올라왔다. 문 대통령은 2022년 4월 29일 청원 답변자로 직접 나섰다. 그는 "개인적으로 청원 내용(청와대 이전 반대)에 공감한다"라며 "큰 비용을 들여 광화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꼭 이전해야 하는 것인지, 이전한다 해도 국방부 청사가 가장 적절한 곳인지, 안보가 엄중해지는 시기에 국방부와 합참, 외교부 장관 공관 등을 연쇄 이전시키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차기 정부가 꼭 고집한다면, 물러나는 정부로서는 혼란을 더 키울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서도 "집무실 이전 과정에서 안보 공백과 경호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정부 입장에 양해를 구한다"라고 말했다. 열흘 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를 나와 낙향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청와대라는 곳이 구중궁궐로 느껴지기 때문에 들어가면 국민과의 접점이 형성되지 않고 소통 부재로 흐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약대로 집무실을 옮겼다. 처음에는 청와대에 발길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영빈관 등을 상시로 이용하고 있다.

이전 비용 등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22년 3월 20일 "(이전 비용이) 1조니, 5000억이니 하는 이런 얘기들이 막 나오는데 그건 좀 근거가 없다. 496억 원의 예비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제 비용은 이를 넘어선 지 오래다. 대통령실에 건물을 내준 합참본부 이전에만 3000억 원 가까이 든다고 국방부는 추산했다. 부대 비용까지 합치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보안 문제는 현실화했다. 2023년 4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대통령실을 도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통령실은 "악의 없는 도청"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들어 방어했다.

대통령실을 이전했으면 그 이유가 실현되거나, 적어도 추구되어야 한다. 국민의힘 대선 공약집에는 이 내용이 나온다. "기존 대통령실은 부처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독점, '제왕적 대통령'은 궁궐식 청와대 구조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수석비서관 폐지, 민정수석실 폐지, 제2부속실 폐지, 조직 슬림화, 총리 및 장관 자율성, 책임성 확대, 청와대 해체 및 대통령실 광화문 이전으로 '제왕적 대통령' 잔재 청산 등을 약속했다.

대통령실을 옮긴 지 1년이 지났다.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은 확대됐나? 국정운영에서 권위와 비효율은 제거됐나? 총리와 장관은 자율적으로, 책임 있게 일하나? 제왕적 대통령 잔재는 청산됐나?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그렇다면 '청와대 탈출'이라는 전시성 이벤트만 남는다. 수천억 원과 20년 넘은 보안 시스템·노하우를 비용으로 치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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